#8. Bastard, baby
epi. 3
우리는 졸지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우리가 커플이 되었다는 사실은 같은 반 친구들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놀라게 했다. 그 애가 눈에 띄는 학생이었기도 했지만 학교에 단 한 명 있던 외국인 학생인 나와 사귄다는 사실은 누가 들어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삽시간에 소문이 쫙 퍼졌다. 학교에 가면 지나가던 선생님들이 나를 붙잡고 말했다, '난 너네 둘이 사귈지 몰랐어!'라고. 그럼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수업시간에 이상하리만치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고 쉬는 시간에도 서로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하지만 매일같이 P와 M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내 눈은 이제 그 애의 뒤를 좇았고 앞을 향했던 나의 책상 의자는 사선 뒷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향해 비틀어졌다.
아직도 처음 그 애의 손을 잡은 날을 기억한다. 그날 우린 하교 후 집에 돌아가는 중이었다. 볕이 더 이상 뜨겁지 않고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 다섯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우리는 발걸음을 맞춰 걷다 길을 건너기 위해 도로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 나라는 횡단보도가 없어서 길을 건너려면 달리는 차 사이로 발걸음을 집어넣어야 했는데 나는 그게 항상 무서웠다. 무서워하지 않고 몸을 밀어 넣어야 사고가 나지 않는데 몸이 마음처럼 안 따라주었다. 그 애는 무심히 도로에 몸을 집어넣었다. 나는 갈팡질팡하느라 그 애의 뒤를 따르지 못했다. 뒤에 내가 없다는 것을 안 그 애는 다시 길을 건너왔다. 멋쩍은 마음에 나는 걸음이 빨라서 따라가지 못했다고 하며 얼른 가자고 했다. 하지만 역시나 쌩쌩 지나가는 차들에 눈이 질끈 감겼다. 나는 그 애의 교복 소매 부분을 살며시 잡고 그 애의 등에 바싹 붙었다. 습한 공기에 젖은 그 애 교복의 섬유 냄새가 연하게 퍼졌다. 그제서야 긴장한 나를 본 그 애는 내 손을 끌어당겨 잡고는 좌우를 살피며 서둘러 길을 건넜다.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을 적당한 힘으로 잡은 그 애는 날 보며 작게 웃었다. 나는 그 애의 손을 쥐지도, 놓지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보고 걸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 건지 아님 다른 이유에선지 숙이고 있는 얼굴이 곧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런 내 반응이 재미있는지 그 애는 또 모른 척 손을 바꿔 깍지를 꼈다. 날이 저물고 어둠이 잔잔히 퍼지는 진파랑 하늘 밑이었다. 쿵쿵쿵. 심장은 내 속도 모르고 요동쳤다. 해가 져도 더위가 가라앉지 않던 날, 맞잡은 두 손이 축축해 미끈거릴 때까지 우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날은 9월 16일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모두가 집에 간 시간, 그 애와 나는 교실에 남았다. 공교롭게도 방과 후 청소 당번이 된 우리는 바닥을 쓸고 칠판을 지웠다. 청소가 끝나고 나는 교실 문 옆 사물함 위에 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늘 왁자지껄한 교실이 처음으로 고요 속에 있었고 창밖에서는 간간이 농구공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덥한 날씨는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청소도구를 정리하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온 그 애가 나를 보고 걸어왔다. 교실이 조용하니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그 애가 말했다. 우리는 사물함에 걸 터 앉아 칠판을 바라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 애가 말했다.
- 처음 우리 학교에 왔을 때보다 지금 네 표정이 많이 달라진 거 알아?
- 내 표정이 어땠는데?
-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 정말로? 하긴 나 그때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 이제 한국에 안 돌아가고 싶어?
- 이제 괜찮아졌어. P도 있고, M도 있으니까.
- 나는?
- 당연히 너도 있지.
그 애의 뻔뻔함에 나는 작게 웃었다. 그 애에게 물었다.
- 나 근데 궁금한 게 있어.
- 뭔데?
- 나한테 왜 Y를 좋아한다고 말한 거야?
그 애의 눈꼬리가 둥글게 말리더니 피식 웃었다. 그 애가 말했다.
- 나는 Y를 좋아한 적이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고.
- 응?
그 애는 나를 보며 빙글 웃었다. 그러고는 왼 손바닥을 펴 보였다.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숨기며 나는 그 손바닥에 내 손바닥을 올렸다. 그리고 그 애는 오른손으로 내 뺨을 감싸 끌어당기며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나는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사랑에 빠지면 단 1초도 예측할 수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인생을 이제 조금 알겠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느닷없는 감정들이 올라왔다. 풍겨오는 그 애의 체취와 입술에 전해지는 낯설지만 따뜻한 온기에 눈을 감았다. 누군가와 입을 맞추는 건 어떤 것일까 항상 궁금했었다. 그건 내 팔뚝이나 손등에 입술을 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추는 것은 생각보다 정확해야 했고 피부와 점막 사이쯤 될 것 같은 입술이 이렇게나 연하고 보드랍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잠잠한 교실 창밖은 진분홍으로 물들어갔고 구름은 베갯 솜처럼 뭉쳐 느리게 흘러갔다. 그날 우리의 첫 키스는 입술과 입술을 그저 꾹 누르고 있는 멋없는 키스였지만 서로가 서로의 처음인 것만큼 멋있는 순간은 없다는 것을 훗날 알게 되었다.
몇 달이 흐른 뒤 우리의 관계는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서로의 존재가 당연했다. 학교가 끝나면 그 애는 항상 나를 기다렸고 우리는 함께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에 내려 낡고 외진 쇼핑몰들을 골라 돌아다녔다. 자질구레한 것들에 웃고 싸구려 옷을 구경하며 먼지 쌓이고 퀴퀴한 쇼핑몰을 누볐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아주 저렴한 가격에 좋은 물건을 횡재하듯 건질 수 있었다. 길을 가다 나는 가끔 그 애의 교복 소매 냄새를 맡았다. 포근한 섬유유연제 향과 더운 날의 공기 냄새가 베어 있었다. 외모부터 너무나 다른 나와 함께 다운타운을 걸으면 곳곳에서 그 애에게 많은 질문들이 날아왔다. 나를 향한 끊임없는 캣 콜링과 키득거리며 칭챙총이라 소리치는 거리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외국인으로 느낄 수 있는 '다름'에 대한 반응들을 모두 느껴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애만큼은 나를 달리 대하지 않았다. 그 애는 내 앞에서 내가 모르는 말로 이야기하지 않았고 나를 위해 거리의 모든 글들을 영어로 해석해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끔 다시 말해주었다. 그 애가 사용하던 단 하나의 모국어는 나를 부르는 말이었다.
'사랑'.
그 애와의 관계가 익숙해질수록 친구들과 멀어지는 나를 느꼈다. P와 M과 지내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 애가 있기 이전의 나의 방과 후 시간은 P와 M에게 몰려 있었다. 우리 세명은 수업이 끝나면 대체로 M의 집에서 그 당시 인기 있는 미국 드라마를 보며 컵라면을 먹는 것이었다. 또 어느 날은 책가방을 어딘가에 던져둔 뒤 대형 쇼핑몰에 가서 coke float을 사 들고 가게에 새로 나온 신상품들을 구경하곤 했다. 비록 내가 유학길에 오를 때 상상했던 하이틴 영화와는 달랐어도 우리 우정의 그 찬란함 만은 같았다. 나는 그들과의 관계를 악착같이 지켜내려 노력했다. 또 혼자가 되지 않을까, 그들이 없다면 나는 다시 투명 인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그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려 시간을 들였고 진심을 다했다. 그들의 존재는 나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그 애가 내 삶에 존재한 후로 항상 그들과 그 애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해야 했다. 나는 매일 P와 M의 초대를 거절해야 했고 그 애와 함께하는 시간에도 그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졸이기 시작했다. 행복한 시간만큼 불안함도 켜켜이 쌓여갔다.
다음 화가 이어집니다.
* <Bastard, baby - epi. 3>의 사진은 특별히도 '고은'님의 작품입니다.
매 이야기마다 의미를 담은 사진을 보내려 하는데요.
이것은 이야기가 독자에게 잘 닿기를 바라며 붙이는 저만의 부적입니다.
이번 이야기의 흐름상 고은님의 사진이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은 것 같습니다.
너그러이 사용을 허락해 주신 고은님께 감사드립니다.
늦지 않게 다음 편으로 찾아오겠습니다.
의선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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