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소수의 연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사람을 싫어한다 생각했다. 외로움을 달고 살면서도 나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상대가 내가 기대한 만큼의 애정을 쏟아 주지 않으면 한순간에 돌아 서 혼자만의 세상으로 들어가 버리기 일쑤였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 사랑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거부하며 살아왔다. 어차피 나는 거부 받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다가오는 인연도 뿌리쳤다. 사춘기 시절 느꼈던 사람과 사랑에 대한 불완전한 생각이 수년간 나를 차갑게 만들었다. 어린 나는 인생에서 인연은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나보다 훨씬 먼저 취직한 대학 동기들이 각자의 입사 동기와 친하게 지내는 게 신기했고 참 부러웠다. 퇴근 후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때때로 여행도 다니는 걸 보며 어쩌면 전장에서 만난 전우들이라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졸업과 함께 일을 할 때 나는 본격적인 실험실 생활을 시작했는데 미묘하게 감도는 경쟁심과 상하관계가 뚜렷한 좁은 실험실에서는 순수한 우정은 개뿔 늘 긴장하며 지내야 했다. 그런 나도 어느새 입사 3개월 차의 신입 연구원이 되었다. 입사 동기는 없다. 눈치껏 분위기를 읽으며 신입의 성실함을 무기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유독 사무적인 이 회사는 인간관계에 지쳐있는 나 같은 사람조차 누군가를 찾게 만든다. 주 5일, 하루 8시간 이상을 보내는 일터에 서로의 속 사정을 아는, 거기 있음이 달가운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라곤 한다. 인생은 인연이 전부라는 진부한 말을 이제야 실감한다.
직장 생활의 허망함이 들어차는 요즘, 나에게도 소중한 회사 동기가 생겼다. 그녀는 나보다 5개월 먼저 입사한 선배이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에 위로받고 의지하니 동기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한다. 입사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탕비실에서 그녀를 마주쳤다. 회의 시간마다 내 건너편에 앉는 그녀는 도도한 얼굴로 아이패드에 늘 끊임없이 뭔가를 적는, 상당히 학구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 그녀가 회의 때와는 다른, 편안한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회의 때 대표님의 뜬금없는 질문으로 자기가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답을 몰라 허공을 보며 엉뚱한 대답을 했는데 그 대답은 완전한 오답이었다는 것 등등 한 음 올라간 목소리로 속사포처럼 상황을 묘사하는 그녀 덕에 몇 달 만에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내가 배를 잡고 웃어서 기분 나빠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웃어버리니 트라우마가 될 뻔했던 일이 아무 일도 아니어진 것 같다며 고마워했다. 첫인상과는 다른 그녀의 밝고 쾌활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때 나는 다른 연구원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는데 그녀의 자조 섞인 일화를 듣게 되니 나만 처음이 어려운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녀를 '예민'이라 부르겠다. 우리는 일하는 분야가 달라 일이 겹치지 않지만 서로의 사정은 잘 아는 거리에 있어 맞장구치며 수다떨기 딱 좋은 위치에 있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점심시간마다 회사 주변을 배회하고 볕이 좋은 자리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시간은 8시간의 일과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된다.
같이 산책하는 시간이 즐거워 아예 매주 금요일마다 밖에 나가 점심을 사 먹자고 했다. 회사 주변은 오피스 지역이라 일찍 나가지 않으면 어느 가게든 사람이 붐빈다. 지난주 우리는 12시가 되기 10분 전에 슬그머니 일어나 점심을 먹으러 다녀왔다. 둘이 동시에 나가면 이상하니 자연스럽게 화장실 가듯 빠져나왔지만 한편으론 누군가 알아차려도 상관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10분을 얕잡아 본 우리의 안일한 실수였다.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선선한 게 완벽한 금요일 점심이었다. 우리는 미리 정해놓은 가게에 가서 마제 소바 한 그릇씩을 비웠다. 밥까지 싹싹 비벼 먹고 나와 아직도 점심시간이 40분이나 남았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커피를 사러 갔다. 매일 마시는 공기가 오늘 왠지 유독 상쾌하다며 우리는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호들갑을 떨며 신나했다. 그렇게 행복한 점심시간을 보내고 사무실에 돌아왔는데 들어온 우리를 보고 선임연구원님이 말했다. '두 분 오늘 점심 일찍 드셨죠? 일찍 나가시면 그래도 점심 먼저 먹겠다고 다른 분들께 인사 정돈해 주세요.' 라고.
우리는 감히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둘 다 뒤통수를 한방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기분은 먼 과거가 되었다.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그분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하신 말씀일 거라고, 절대 면박을 준게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마인드 컨트롤에 들어갔다. 하지만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통제 영역 밖이다. '10분 먼저 나간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식사 맛있게 하시라고 인사를 안 해서?',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몰려다니는 게 아니꼽나?' 혼자 자문자답하며 우울해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단체로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게 되었다.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실없는 소리를 했으며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 예민 또한 있는 듯 없는 듯 다른 연구원들 틈에 끼어 냉동고를 뒤적거렸다. 이날 우린 다신 일찍 밥 먹으러 나가지 말자 약속했다.
그날 이후에도 우리는 매일 이른 점심을 먹고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 수다를 떨며 웃는다. 마치 중고등학생들이 점심시간에 운동장을 뱅뱅 돌며 깔깔거리는 것처럼. 그리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점심시간이 끝나는 1시에 맞춰 들어온다. 다음번에는 함께 반차를 쓰고 나가기로 했다. 맛있는 점심을 천천히 편안하게 먹자고, 여유 있게 차도 마시자고 약속했다. 어리숙한 신입 둘이 의지하며 정붙이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다. 언젠가 우리 중 누가 퇴사하게 된다면 5개월 전부터 언질 해줄 것을 서로에게 당부했다.
좋은 사람과 일상을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지금에서야 알아차린다. 사람은 웃음 포인트와 빡침 포인트가 맞아야 친해질 수 있다고 하지 않나. 그런 사람이 하루 삼분의 일의 시간을 보내는 회사에 있다는 게 든든하다. 퇴근하고 소파에 앉아있다 문득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을 내 영역에 들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동시에 내가 선택한 인연을 내 영역에 들여 함께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최근 방영되는 인기 연애 프로그램에 40대의 솔로들이 나와 하는 말을 들으니 인생의 동반자를 차곡차곡 모아놓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절감했다. 그들은 경제능력이 출중한 싱글들이다. 젊었을 때 자기 잘난 맛에 살다가 사람을 놓치기 일쑤였다고 한다. 더 이상 청춘이 아닌 40대의 중년이 된 그들은 이제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시간도 있는데 인연은 없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돈, 시간, 건강 모든 걸 가져도 내 옆에 좋은 사람이 없다면 참 쓸쓸한 인생이겠구나 하고 다시금 생각한다.
세월이 지나가며 실감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춘기의 나는 입으로는 사람이 싫다고 말하며 결국 사람으로 치유받고 사람에게로 나아갔다. 그때 내가 싫다 말한 '사람'은 나의 영역 밖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람이 좋다고 고백하는 서른 살이 말하는 '사람'은 나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다. 불교에 일인일우주(一人一宇宙)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우주'라는 말이다.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무수한 별을 담고 있는 우주를 아는 것과 같이 대단한 일이라는 것이다. 만인의 연인이 아닌 소수의 연인이 되고 싶다. 그 인연이 사랑의 형태든, 우정의 형태든, 세상이 단정할 수 없는 관계의 형태든 말이다.
이제야 인생이 뭔지를 알 것 같다 말하는, 아직은 애송이인 나는 그런 이들을 하나씩 내 마음에 모아가고 있다. 재미없고 단조로운 인생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꾸미기 위해서다. 아마 다들 마음속에 품고 있을 것이다. 이유 없이 좋은 사람, 내 것을 다 줘도 아깝지가 않은 사람,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사람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다. 아끼는 이들에게 조금도 부족함 없이 사랑을 줬던 사람이고 싶다.
분기간 이의선
分期間 李宜宣
* 지난 몇 주간 쓴 본격적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고치고 고치다 결국 최근 들었던 마음을 정리해 새로 쓴 글입니다.
언제나 보드랍게 걸러진 글을 쓰고 싶지만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쉽지가 않아
오늘은 담백한 마음을 담은 글을 보냅니다.
흐린 금요일입니다.
조금은 정체된 기분으로 누군가에게 닿기 원하며 글을 보냅니다.
이의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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