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순기 - epi. 2
비스듬히 기운 해가 발갛게 타는 햇볕을 내어놓는 오후, 오라이식당에선 약하게 회전하며 돌아가는 선풍기와 이따금씩 위잉 소리를 내는 냉장고만 존재하는 것 같다. 순기는 잠깐 눈만 붙인다는 게 아주 깊은 단잠을 잤다. 머리에 밴 방석의 퀴퀴한 냄새가 순기의 숨에 들어오자 순기의 귀한 낮잠은 끝이 났다. 아주 오랜만에 영주의 꿈을 꿨다. 영주가 사무치게 그리웠던 젊은 밤에는 꿈에서도 얼굴을 비춰주지 않더니 순기가 늙고 휘어진 지금 꿈에 나온 게 참 괘씸하다. 과묵하고 신중했던 영주였기에 꿈에 나오는 것조차 마땅한 때를 보는 것일까 하고 순기는 생각했다. 영주를 떠나보내고 홀로 네 아이들을 기르며 순기는 매일 밤 소리를 죽여 울었다. 어떻게 나를 혼자 두고 갈 수 있느냐고, 당신의 삶은 참으로 무책임하다고, 구겨지듯 죄여오는 가슴과 꽉 뭉쳐버린 것 같은 목구멍을 비집고 기어이 울음이 새어 나왔다. 영주가 떠나던 날을 잊을 수 없어 너무나 괴로웠다. 다 지나간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멀리 달아난 기억이라 여겼는데 지금 또 먹먹하게 차오르는 마음을 순기는 어찌하지 못한다. 우두커니 앉아 영주를 떠올려 본다. 매일 닦고 비빈 식탁 상을 순기의 뭉툭하고 거친 손이 부드럽게 쓸었다.
일 년여 전부터 영주는 자주 두통과 어지럼증에 시달렸다. 국민학교 저학년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이었던 영주는 생각보다 많은 일들을 해내야 했다. 그들이 사회의 질서를 배우고 정규 교육을 이수하게 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일이었다. 바지에 실수한 아이를 씻기는 일이라든지, 엄마가 보고 싶다며 꺼이꺼이 목 놓아 우는 아이를 달래는 일, 매일 같은 이유로 같은 친구와 싸우는 아이들을 중재시키는 일 등을 해내다 보면 이상하게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몇 년간 밥 먹듯 해오던 일인데 말이다. 아이들을 좋아하던 그는 칠십여 명 학생들이 쉬지 않고 종알대는 것을 사랑스럽게 여겼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온갖 것이 자극으로 느껴졌다. 어쩔 때는 하고 싶은 말이 자연스레 나오지 않았다. 영주 자신도 느낄 만큼 어눌한 발음이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그럴 때면 찬 바닥에서 자 입이 돌아간 것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집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그는 조용히 안방에 들어가 작은 오봉을 펼쳤다. 머리가 아플 때 즉효인 것이 바로 술이다. 순기에게 술상 좀 봐달라고 했다. 또 술을 먹느냐고 잔소리할 것이 뻔하지만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골머리를 가라앉히려면 몇 모금이 간절했다. 순기는 요즘 들어 머리가 자주 아프다는 영주에게 술이 먹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손은 분주하게 부엌을 오갔다. 두부와 부추로 단단하게 빚어 놓은 동그랑땡에 달걀물을 묻혀 달궈진 기름에 튀기기 시작했다. 고소하게 달걀 튀겨지는 냄새가 집 안을 매웠다. 이어 잘 익은 김장 김치도 한 포기를 꺼내 밑동을 자르고 서걱서걱 썰어 접시에 담았다. 김치를 접시에 옮기다 도마에 떨어진 남은 조각을 입에 넣었다. 아직 아삭한 배추와 젓갈을 넣지 않아 시원한 김장 김치가 입안에서 순기의 침샘을 자극했다. 얼추 준비한 안줏거리와 맑은 진로 소주 한 병을 쟁반에 받쳐 들고 안방으로 들어섰다.
"째깐한 애들 가르치는 게 뭐 그렇게 고생이라고 허구한 날 술을 마시는지, 참말로..."
영주는 순기의 빠른 손놀림이 매번 신기했다. 입으로는 구시렁구시렁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영주의 술상을 차리는 순기의 손에는 사랑이 가득 묻어난다. 시원한 소주를 좋아하는 영주를 위해 순기는 큰 스티로폼 상자를 얻어 와 차가운 물을 담아 소주를 식혀 놓고 항상 두어 가지의 안줏거리를 준비했다. 그마저도 매일매일이 다르게 말이다. 순기는 영주의 곁에 한 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당신 요즘 술을 너무 자시는 것 같어."
순기의 걱정에도 영주는 별말 없이 소주를 잔 가득 따랐다. 투명한 소주 병에 담긴 맑은 액체가 영주의 손짓을 따라 얄랑이다 이내 잦아든다. 자신의 말에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순기는 얕게 한숨 뱉고 방금 씻고 나온 선옥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어 내리고 있다. 영주는 선옥만 보면 스르륵 미소가 지어진다. 조금만 세게 팔을 잡았다간 뚝 부러져 버릴 것 같은 선옥의 마른 몸이 늘 걱정이긴 했지만 선옥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명석한 구석이 있었다. 조금만 알려주어도 그 이상의 질문을 해 스스로 배우는 아이였다. 순기의 억센 빗질에 선옥의 고개가 뒤로 까딱까딱 넘어갔다. 그 광경을 영주는 빤히 바라본다.
하루는 선옥이 보이지 않아 순기가 골목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밥을 짓는 순기의 옆에 꼭 달라붙어 있어야 할 선옥이었다. 집에 돌아온 순기는 안방구석에 뜨거운 숨을 내쉬며 누워있는 선옥을 발견했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펄펄 끓고 있었고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식은땀을 흘리는 선옥을 들어 젖은 옷을 벗기고 요를 깔아 눕혔다. 몸이 어찌나 뜨거운지 선옥의 작은 입술이 퍼석하게 말라 있었다. 순기는 얇은 수건을 물에 적셔 선옥의 몸을 닦았다. 날 때부터 유독 작았던 선옥의 몸은 길쭉하게 키만 컸지 영 통통해지지 않았다. 비실비실한 막둥이가 딱해 가끔은 값비싼 바나나 두어 개를 사와 연자와 동범이 몰래 선옥에게 먹이곤 했다. 선옥은 바나나를 먹다 연자가 들어오면 연자에게 내어주고 동범이가 나타나면 동범에게 양보하는 착한 아이였다. 제 형제에게 다 내어주고도 같이 먹으니 더 맛있는 것 같다는 우리 막둥이가 언제 제 몫을 챙길 수 있을까 순기는 걱정이 되었다. 항상 순기 곁을 맴돌다가도 조용하다 싶어 찾아보면 선옥은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순하디 순한 아이는 몸이 아플 적에도 투정 부리거나 우는 법이 없었다. 이런 맹물 같은 아이가 어디서 떨어졌을까. 어릴 때 자주 아팠다는 영주를 닮은 걸까 아니면 선옥을 가졌을 때 심한 입덧을 한 탓인가, 순기는 생각했다.
"선옥이 말여요. 보약이라도 한 제 지여 멕여야 할까 봐. 애가 비실비실해서는 그냥 어디 가서 큰일이라도 날까 봐 을매나 속이 상허는지... 당신, 탕약 잘 짓는 김 씨 아저씨한테 가서 좋은 거로 다 가 한 제 지어와봐요. 응?"
저녁상을 치우고 단감을 깎아 영주 앞에 내려놓으며 순기는 말했다. 영주는 단감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옥은 벌써 이부자리를 펴고 잠들어 있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검은 머리칼을 베갯잇에 늘어뜨리고 이제는 작아져 발치를 다 덮지도 못하는 작은 요를 덮은 채 새근새근 잠든 선옥에 한참이나 시선을 두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체구가 작고 깡마른 선옥이 영주도 늘 걱정이긴 하다. 내일 퇴근을 하고 김 씨 아저씨네 들러 보약 한 제 부탁해야겠다 영주는 생각했다.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연자가 순기에게 소리쳤다.
"엄마! 나도 보약 지어줘! 왜 맨날 선옥이만 이뻐하고 나는 거들떠도 안 봐? 아부지, 내 보약도 지어다 주세요!"
"선옥이는 몸이 원체 약하니까 그러제. 니는 살이 통실통실하구만 보약이 왜 필요혀! 퍼뜩 가서 숙제나 혀!"
연자는 씩씩 소리를 내며 자리를 뜬다. 금방이라도 연자를 따라가 꿀밤을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순기는 참을 인을 삼키며 화를 달랬다. 연자는 누구를 닮았는지 항상 누군가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에도 말이다. 영주는 연자의 투정을 선옥이한테 그랬듯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연자가 골내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 엄하게 혼을 냈다. 순기에게도 당부했다. 연자는 정이 많고 착한 아이이지만 자신의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항상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고.
코스모스가 길가에 아름답게 피어 휘날린다. 한 집 건너 한 집에 있는 오래된 감나무에 발그스름하고 통통한 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그중 과육이 물렁해져 부드러워진 홍시는 여기저기에서 날아온 들새들의 고마운 밥이 된다. 영주는 퇴근 후에 김 씨 아저씨네 들러 보약 두 제를 부탁했다. 한 제는 선옥을 위해, 나머지 한 제는 요새 들어 잔기침이 는 순기를 위해서 지어달라 부탁했다. 한약이 지어지려면 보름 정도 걸린다고 김 씨 아저씨가 말했다. 영주는 급할 거 없으니 좋은 약재로 정성 들여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며칠 뒤 재단사를 따라다니며 손님의 양복 치수를 적고 있던 순기를 양복점 사장님이 다급하게 불렀다. 늦은 오후시간이라 예약한 손님과 그냥 온 손님이 뒤섞여 정신없이 바쁠 시간대였다. 자신의 이름이 큰 소리로 불리는지도 모른 채 치수를 확인하던 순기를 재단사가 불러 세웠다. 고개를 들어 보니 사장님이 불안한 눈으로 순기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언가 어두운 형체가 순기의 눈앞을 둘러싸는 것 같았다. 그 검은 형상을 본 순간 순기는 걷잡을 수 없는 흑암 속에 빠진 것 같았다. 사장은 말했다.
응급실에서 방금 전화가 왔다고. 장영주 씨가 쓰러져 현재 의식이 없다고. 무엇이 일어나든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 다음 화가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