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순기 - epi. 3
딸랑.
식당 문을 열고 기선이가 들어온다. 우두커니 앉아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던 순기가 식당 문을 돌아보며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다 말고 얼굴 한가득 빛을 내며 웃는다. 뒤이어 기저귀 가방을 멘 선옥이 바삐 기선의 발걸음을 좇으며 식당으로 들어선다. 순기는 식당 바닥에서 얼른 일어나 꽃무늬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고 걸을 때마다 뾱뾱뾱 소리가 나는 신발을 신은 기선을 안아들었다. 순기는 기선의 보드랍고 말큰말큰한 뺨에 얼굴을 비빈다.
"우리 똥강아지 왔어요~ 우리 아기가! 우리 공주님이 할머니 보러 왔어~" 기선에게서 나는 분유 냄새에 순기는 절로 흐뭇해진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해야지 기선아. 기선이랑 장 보러 나왔다가 엄마 보려고 들렀어. 엄마, 자다 일어났어? 얼굴이 부은 것 같네. " 선옥이 순기의 얼굴을 쳐다보며 얘기한다.
"아녀. 깜빡하고 잠들었다가 방금 일어나서 그냥 앉아 있었어. 밥은 먹었어? 밥 안 먹었으면 돌솥 하나 해주려? 아님 단감 있는데 깎아줄까?"
순기는 단감을 찬물에 부득부득 씻어 접시에 담는다. 뭉툭한 과도와 작은 손님용 포크를 쟁반에 담고 선옥 앞에 앉았다. 순기와 선옥 모두 신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신맛이 나는 과일은 먹기 전부터 혀 아래가 아려온다. 집에 오렌지, 자두, 딸기, 감귤같이 조금이라도 시큼한 맛이 나는 과일이 들어오면 두었다가 미자나 연자의 손에 들려 보냈다. 하지만 선옥이 신 과일만 찾던 때가 있었는데 바로 기선을 가졌을 때였다. 선옥은 기선을 가지고 입덧을 심하게 했다. 적게나마 먹은 음식들을 모두 게워내고 폭폭 김을 내는 압력밥솥조차 멀리했다. 원래도 빼빼 마른 선옥이 점점 더 야위어 가던 시절이었다. 그때 선옥의 쇄골은 뼈가 도드라지다 못해 우물처럼 움푹 패었고 톡 튀어나온 광대뼈 밑으로 볼이 쑥 들어가 그나마 몸에 비해 통통하던 얼굴마저 딱딱한 형체에 천을 깔아놓은 양 파리했다. 선옥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딸이라 확신했을 때가 바로 선옥이 신 과일을 찾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밥을 입에 대지도 못하는 선옥을 위해 혹시나 해서 금귤을 샀는데 보기만 해도 턱 밑이 시큰해지는 금귤을 그렇게 잘 먹을 수가 없었다. 선옥이 작고 단단한 금귤을 입에 쏙쏙 넣으며 "이건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했을 때 순기는 알게 되었다. 자식은 내가 낳은 작은 자신이라는 것을.
순기는 단감의 마른 꼭지 부분을 손으로 잡아떼고 과도로 칼집을 내어 손으로 반을 갈랐다. 반쪽짜리 단감 하나에는 씨앗이 있던 곳이 텅 비어 움푹 패였고 다른 한 쪽에는 반질반질하고 싱싱한 씨앗이 불쑥 솟아 있었다. 순기 자신이 임신했을 때도 금귤만 집어먹던 생각이 났다. 네 번의 임신 중 입덧이 가장 심했던 건 선옥을 가졌을 때였다. 물만 삼키려 해도 비린내가 나서 뱉어버릴 정도로 입덧이 심했는데 울렁이는 속을 달래려 영주가 사다 놓은 금귤 하나 집어먹었더니 금귤의 시고 달큼한 맛이 어쩌면 그렇게 맛있는지 부글부글하던 속이 괜찮아졌다. 영주에게 "이 비싼 낑깡을 어디서 이렇게 많이 가져온겨?"라고 물으면 영주는 허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어쩜 그런 부분까지 자신을 닮았는지 순기는 신기했다. 순기가 단감의 씨를 발라내고 네 등분을 내어 얇게 껍질을 깎았다. 씨가 있던 부분이 투명하고 매끄럽게 패었다. 선옥이 기선의 손에 작게 잘린 단감 한 조각을 들려주었다. 앙증맞은 기선의 손이 단감을 꽉 쥐었다. 야무진 손끝으로 미끄러운 단감을 단단히 잡고 그 앵두 같은 입을 살그머니 벌려 단감을 야무지게 음미했다. 그 귀여운 모습에 순기는 선옥이 어릴 때랑 똑같네라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단감은 단단해서 단감인지, 달아서 단감인지 같은 것들을 말하며 선옥도 젓가락으로 단감 한 조각을 집어먹었다. 순기는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잘 익은 단감을 골라 다시 꼭지를 따고 과도로 네 등분을 내고 껍질을 얇게 깎으며 선옥에게 말했다.
"아까 잠깐 누워서 눈을 붙였는데 꿈을 꿨잖어. 글쎄 너네 아부지가 꿈에 나온겨." 순기는 아무렇지 않게 단어를 뱉어냈다.
"정말? 아빠가 어쩐 일이래? 엄마 원래 아빠 꿈 안 꾸잖아." 선옥이 단감을 아작 베어 물며 말했다.
"그러게나 말여. 그렇게 보고 싶을 때는 꿈에도 안 나오더니 이제서야 미안했나 보지." 기선이 단감을 용케도 안 떨어뜨리고 오물오물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며 순기는 선옥에게 대답했다.
그날 응급실에 달려간 순기는 영주의 가슴팍을 퍽퍽 때리며 넋을 놓고 오열했다. 간호사가 순기를 제지하느라 순기의 몸을 붙들자 순기는 옷자락을 흔들어 벗어버렸다. 하지만 영주의 가슴 깃을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이미 혈색을 잃어버린 영주의 얼굴은 이승의 사람이라 믿기 힘들 만큼 무섭게 느껴졌다. 뇌졸중이라고 했다. 뇌로 가는 혈관에 어느 한 부분이 막혀 터져 버렸다고. 당장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 물었지만 영주가 쓰러진 후 너무 늦게 발견되어 현재로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하는 무책임한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누가 무책임한 것인지 순기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이 대머리의 의사 양반이 무책임한 것인지, 쓰러져도 왜 엎드린 채 쓰러져 발견마저 늦게 된 바보 같은 영주의 성정이 무책임한 것인지 말이다. 이름도 생소한 뇌졸중이 영주를 데려가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뇌압이 상승해 어떠한 처치를 하기에도 위험이 크다고 했다. 의사는 어려운 말들을 순기에게 계속 쏟아내었다. 이 정도까지 심각한 뇌졸중이라면 반드시 전조증상이 있었을 터라고 말하는 의사 양반에 말을 가만히 들었다. 두통이나 어지럼증을 호소하진 않았는지, 말이 어눌하게 나오지는 않았는지, 평소 과음을 하진 않았는지 따위를 묻는데 순기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병실 침대에 누워 여러 가지 장비를 달고 있는 영주의 모습만 쳐다보았다.
'부처님, 하느님...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셔요... 이 사람 다시 괜찮아지면 꼭 보답하면서 살게요. 누구에게든 갚으면서 살게요. 이렇게 데려가시면 우리 애들은 어떡하나요. 나는 어떡하나요...'
의사가 말하는 모든 예제가 영주에게 들어맞았다. 정말로 무책임한 건 순기 자신이었다. 요즘 들어 하루도 빠짐없이 머리가 지끈 지끈하다는 영주의 말을 흘려 들었다. 가끔 영주를 보러 학교에 가면 교실에서 나오는 병아리 같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귓전을 따갑게 울렸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빠져나간 빈 교실 교탁에 서 있는 영주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보람차 보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몹시도 사랑한 그를 책망하고 싶지 않았지만 칠십여 명의 아이들이 떠들어 대는 교실에서 몇 시간 동안 있으면 골이 울릴게 틀림없었기 때문에 영주가 머리가 아프다고 할 때 드디어 아이들에 대한 콩깍지가 벗겨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영주의 머리가 아플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일같이 술을 찾았던 영주에게 정성 들여 술상을 차려주었던 자기 자신은 변명할 길이 없다. 매일같이 소주 한 병을 비운 영주였다. 코가 찡해지는 알코올에 위라도 상할까 싶어 부지런히 안주를 만들어 주었던 자신의 손을 찰싹 때려 정신 차리라고 말해주고 싶을 만큼 밉다. 순기는 자신의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 이내 가슴팍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목이 나가라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기도 했다. 그러다 누워있는 영주에 배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기를 반복했다.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커튼을 치기 시작했다. 순기와 영주를 흘긋흘긋 번갈아 보며 딱하다는 듯이 동정의 눈빛을 보냈다. 저들은 병상에서 사과도 깎아 먹고 주스도 마시는데 순기는 그럴 여유가 없다. 차라리 동정의 눈빛을 보내는 저들이 죽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가져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사흘 뒤 영주는 순기의 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