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순기 - epi. 4
"문화센터는 다닐만해?"
선옥이 물었다. 어느새 선옥은 순기가 쥐고 있던 과도를 빼앗아 단감을 깎기 시작했다. 기선은 식탁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두 손으로 단감을 꼭 쥐고 빨갛고 조그만 입술을 오므려 열심히 단감을 빨고 있다. 기선의 꽃무늬 원피스 위에 떨어진 단감 조각을 주워 먹으며 순기가 대답한다.
"나 말여. 두 달 있다가 문화센터에서 하는 콩데스토인가 나갈거여. 민요, 가요, 동요 할 것 없이 다 참가할 수 있다네? 우리 기선이도 할머니랑 같이 콩데스토 나갈까? 어이, 우리 이쁜 공주?" 순기가 기선이의 뺨을 두 손으로 비비자 기선의 볼이 납작해지며 입술이 삐쭉 나온다.
"콩데스토가 뭐야... 아, 콘테스트? 노래 자랑하는구나! 상품도 있어? 엄마 거기 나가려면 저 가사 다 외워야 되겠네. 이왕 나가는 거 일등 하고 와."
"일등은 콤퓨타 준다허고 이등은 김치냉장고 준댜. 콤퓨타는 못 타도 엄마가 김치냉장고는 타야 허지 않겄어?" 순기가 깔깔대며 너스레를 떤다.
영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순기는 슬퍼할 새도 없이 일어나야 했다. 남편을 잃은 것보다 평생 아버지없이 살아갈 아이들이 눈에 밟혀 자기 자신은 돌아보지 않은 채 살아갔다. 장례식을 준비하고 조문객을 맞이하며 바쁘게 지내다 보니 정작 영주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장례는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면 영주가 순기를 맞아줄 것만 같았다. 수고했다고 등을 쓸어줄 것 같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올라간 뇌압이 떨어지지 않자 영주에겐 의식장애가 생겼고 뒤이어 호흡기에도 문제가 일어났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영주의 이마를 손으로 단단히 고정해 낫같이 생긴 무언가를 들고 와 영주의 입속에 밀어 넣었다. 이후 영주의 입에는 기다란 호스가 꽂혔고 것도 얼마 지나지 않자 소용이 없게 되었다. 염을 한 영주의 모습은 더 이상 그로 보이지 않았다. 생기 없고 누렇고 퉁퉁 불은 밀가루 반죽을 사람 형태로 빚어 놓은 것 같았다. 선옥에게는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선옥을 끔찍이도 사랑한 영주가 막내딸에게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그런 모습으로 남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동범이는 삼베에 검은색의 두 줄이 배색된 완장을 교복 위에 차고 방문하는 조문객들에게 연거푸 맞절을 하고 인사를 했다. 모두들 아이들을 붙잡고 울었다. 딱하다면서, 앞으로 엄마 말 잘 들어야 한다면서. 순기는 핼쑥해진 얼굴로 동범이 옆에 앉아 영주의 영정사진만 보고 있었다.
'당신은 떠난 게 아니지? 조금만 지나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올 거지? 이 토끼 같은 자식들은 어떡하고 나 혼자 두고 떠날 수 있어... 차라리 나를 데려가시지... 차라리 나를...'
그렇게 장례식에서도 멍하니 영주의 영정사진만 바라볼 뿐이었다. 영주의 인생을 보여주듯 많은 학부모들과 아이들이 장례식에 찾아왔다. 그중에는 이미 대학생이 된 이들도 있었고 돈을 벌고 있는 어엿한 사회인이 된 아이들도 있었다. 모두 입을 모아 영주가 얼마나 훌륭한 스승이었는지 순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영주는 정말로 아이들을 사랑했다고, 자신들이 이만큼 클 수 있었던 것은 영주의 덕이라 말했다. 순기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고마움도 느끼지 못했다.
'너희들이 그만큼 클 동안은 살아 있었는데 왜 우리 아이들은 아빠 없는 아이들이 되어야 하는 건데?'
순기는 아무에게 들끓는 원망과 통한만 가득했다. 처음에는 영주의 죽음을 부정하다가, 이제는 화가 났다. 죽어버린 영주에게도, 순기를 위로하는 조문객들에게도, 지나가는 행인한테마저도 화가 났다. 아무것도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모래를 잔뜩 먹은 느낌이었다. 입안이 까슬까슬하고 껄끄러웠다. 며칠 새 순기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보였다. 생기 있고 통통하던 뺨은 핼쑥하고 창백해졌다. 윤기 있던 머리카락은 거칠고 푸석푸석한 채로 질끈 동여 매어져 있었다. 그 위에는 흰색 싸구려 리본을 겹쳐 끼워 만든 상주용 머리핀이 집혀 있었다.
삼일장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순기는 곤히 잠든 선옥의 얼굴을 거친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리고 선옥의 얼굴에 일어난 퍼석퍼석 한 각질과 눈에 띄게 앙상해진 선옥의 몸을 보고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우리 애들이 어디서 아비 없는 자식들처럼 보이지 않게 만들 거야.' 그제야 돌아 본 집 안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바닥은 쓸고 닦지 않아 버적버적 무언가 밟혔고 여기저기 설거지거리가 돌아다녔다. 빨래에서는 쉰내가 났다. 영주가 벗어놓은 옷가지들은 슬프게도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옷들을 손에 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희미하게 나는 영주의 냄새가 순기 속으로 들어왔다. 조금이라도 남겨두고 싶었다. 담아둘 수만 있다면 어딘가에 꽉꽉 담아 밀봉해두고 영주가 보고 싶을 때마다 한 번씩 꺼내어 맡고 싶은, 사무치게 그리운 남편의 냄새였다. 다시 눈시울이 벌게지고 눈가와 코가 매워졌다. 순기는 영주의 옷을 손에서 놓고 다시 일어나 집안을 훑었다. 일전에 만들어 둔 밑반찬들과 영주가 먹다 남긴 안줏거리에는 허연 곰팡이가 생겼다. 변기에는 붉은 물때가 끼고 수건은 동이 나 있었다. 영주가 쓰러진 이후 집 안은 완전히 버려졌었다. 영주를 애상할 시간은 순기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순기는 일어나야 했다. 마음을 동여매고 가슴을 꽉 다 잡아야 했다. 이제 장영주의 아내, 김순기의 역할은 없다. 그저 엄마 김순기의 역할만 남았을 뿐이다. 고무장갑을 끼고 앞치마를 허리춤에 둘러맸다. 바닥을 쓸고 걸레질을 하며 집 안을 광이 나게 닦고 또 닦았다. 부엌에 있는 모든 음식들을 한데 모아 버렸다. 영주가 좋아하던 겉절이, 파김치, 두부 부침, 동그랑땡을 남김없이 쓰레기봉투에 모아 버렸다. 저녁마다 술상이 되어 준 가볍고 널찍한 오봉도 행주로 훔쳐 닦고 다리를 접어 광에 넣어 뒀다. 한결 깨끗해진 부엌을 순기는 훑어보았다. 그리고 구석진 곳에 놓여 있는 진로 소주 3병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이 그렇게 마시고 싶어 했던 소주를 많이도 남겨놨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다 마시라고 할걸 그랬어. 거하게 마시고 알딸딸할 때 꼭 한 번 끌어안아줄 걸 그랬수...' 순기는 투명한 소주 병을 괜히 만지작거린다.
어느새 선옥이 일어나 순기의 옆에 눈을 비비고 서 있다. 내복 차림의 선옥이 추운지 양 발을 포개 발바닥으로 발등을 문지른다. 순기는 선옥의 이마를 쓸어 올려 정수리, 뒤통수, 등, 허리까지 손으로 쭉 쓰다듬었다. "우리 똥강아지..." 선옥을 꼭 안았다. 가장 속이 탔을 선옥이었다. 순기가 정신없는 틈을 타 작은 몸으로 병실에서 온갖 심부름을 다 해주던 착한 우리 막내딸이 제 아빠가 세상을 떠났을 때 믿어지기나 했을까. 죽음이 뭔지는 알까. 순기조차도 어려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선옥의 마르고 작은 등을 하염없이 토닥이며 순기가 말했다.
"선옥아, 우리 아부지한테 소주나 한 잔 따라드리자."
선옥과 순기는 따뜻한 옷을 챙겨 입고 마당으로 나갔다. 부엌에 있던 진로 소주 3병을 들고서. 그리고 집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소주를 조금씩 바닥에 뿌렸다. 한 병은 순기가, 한 병은 선옥이가. 그리고 남은 한 병은 영주의 물건이 보관된 서랍장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이 소주를 버릴 날이 오겠지, 영주의 윗도리를 꺼내 코에 대고 크게 숨을 들이 마셨다. 알싸하고 포근한 영주의 냄새가 순기의 코로 들어와 바로 옆에 영주가 앉아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옷을 서랍장에 고이 넣어놨다. 영주가 너무나 보고 싶은 날이면 순기는 서랍장 앞으로 가 영주의 옷을 꺼낼까 고민했다. 그의 냄새를 너무 자주 맡으면 사라져버릴까 최대한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았다. 눈에 눈물이 가득히 고이는 날이면 홀로 마당에 나가 찬바람을 쑀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목이 매워서 아프기까지 했다. 그래도 나는 엄마니까. 울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