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순기 - epi. 5
순기는 일당이 작은 양복점 일 말고 보수가 좋은 일이 필요했다. 미자는 이제 곧 성인이 되니 순기를 도와 동생들을 먹일 수 있겠다 싶었다. 무슨 일이든 못할 일이 뭐 있겠냐 싶지만 잘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었다. 손에 익고 잘 아는 일, 음식을 만드는 일처럼 말이다. 그래, 음식을 팔아야겠구나. 순기는 깨달았다. 포장마차 정도는 차릴 수 있지 않을까 하며 통장을 들여다보고 있던 와중 누군가 대문을 두들겼다. 철문을 열어보니 한약 짓는 김 씨 아저씨가 서 있었다. 김 씨 아저씨는 커다란 박스를 두 개 끌어안고 마당으로 들어왔다. 그는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순기에게 안부를 물었다.
"제수씨! 안녕하셨지요? 큰일 겪으셔서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안 그래도 영주 녀석이 부탁한 한약을 다 포장한 참이었는데, 녀석 그렇게 허망하게 가버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럴 줄 알았으면..." 김 씨는 말끝을 흐리며 마른 세수를 했다.
왜 한약이 두 제냐고 묻지 않아도 순기는 알 수 있었다. 상자 밖에 커다랗게 쓰인 '김순기'라는 이름과 '장선옥'이라는 두 이름. 그냥 먼 길을 떠나보낸 사람이라 생각하고, 가슴의 뚜껑을 단단히 잠그고 살아보려 했던 순기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한약 상자를 보고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영주가 다시 흘러나왔다. 완전히 바싹 말라 물기 하나 없이 바삭이는 낙엽이 깔린 마당 바닥에 주저앉아 순기는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무너지는 순기의 모습에 김 씨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그의 등을 토닥였다. 눈물과 콧물과 침이 한데 섞여 무엇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투명한 액체가 순기의 얼굴에서 흘러나왔다. 엉엉 울다가 마음을 다 잡아 보려 옷소매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면 눈앞에 또 그 한약 상자가 눈에 보였다. 그럼 또 순기는 코가 매워지고 눈시울이 불어지며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물이 가득 차올라 또 제 가슴을 치며 원통함과 허망함을 토해 내었다.
힘겹게 다잡은 순기의 마음을 영주는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와 쑥대밭을 만들어 놓는다. 방금 지나간 사람에게서 영주의 냄새가 날 때, 마루 구석에서 낡은 영주의 구두를 발견했을 때, 동범이의 얼굴에서 영주의 모습이 보일 때. 덤덤하게 흘러가던 일상이 이런 작은 파편들의 습격으로 얼어붙는다. 그리고 한참을 그 자리에 고여 있다 시간이 지나간 테두리를 따라 다시 흘러가길 반복한다. 단단해지기 위해서 순기는 연하디연한 속살을 내보여야 했고 강해지기 위해서 매일이 자신의 마지막 날인 양 살아내야 했다.
여보, 나 할 수 있어. 나 김순기잖아. 당신이 항상 여장부라고 부르던. 그니까 우리 애들 걱정하지 말고 거기서 행복하게 나 기다려줘.
*
좁은 골목에 위치한 순기의 작은 백반집이 새벽부터 멸치육수 냄새를 풍긴다. 영주가 떠나고 순기가 모아 둔 돈과 영주가 따로 모아두던 돈을 합하니 식당 하나를 낼 수 있을만한 돈이 되었다. 7평 남짓한 공간이라 테이블도 4개뿐이고 가게 앞까지 가스를 끌어와 국물을 끓여야 했지만 순기는 감사했다. 식당을 준비하느라 바빠진 탓에 영주의 생각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순기는 그 식당을 '오라이식당'이라 지었다. 별 뜻은 없다. 그저 많은 손님들이 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드럼통에 은색 쟁반을 용접해놓은 테이블을 순기는 매일 윤이 나도록 닦았다. 행주에서 냄새가 나지 않도록 매일 아침 식초 넣은 물을 팔팔 끓여 행주를 삶았고 손님들이 먹다 남은 소주를 모아 놨다가 테이블을 닦을 때 사용했다. 순기의 지혜는 다방면으로 유용했다. 여러 사람이 맨손으로 수저를 뒤적뒤적 하지 않게 수저는 물과 밑반찬을 내어 줄 때 같이 냈고, 요리하면서 튀긴 기름에 끈적끈적 해진 부분이 없도록 매일매일 거품을 내 집기들을 헹궈냈다.
순기가 새벽부터 식당에 나와 일을 하면 미자가 동생들을 깨워 아침밥을 먹이고 학교에 보냈다. 그리고 늦은 오전이 되면 미자도 오라이식당으로 와 점심을 먹고 식당 일을 거들었다. 학교가 마칠 시간이 되면 아이들이 하나 둘 오라이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어린 선옥은 식당 구석에 순기가 펴놓은 돗자리 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었다. 술 취한 손님들의 고성이 식당을 울려도 선옥은 언제나처럼 숙제를 하고 책을 읽고 공기놀이를 하며 요리하는 순기의 옆을 지켰다. 선옥은 영주가 떠난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영주가 병원에 있을 적에도, 영주의 장례를 치를 때도 선옥의 눈에는 커다란 눈물방울이 어려있었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지 않았다. 순기가 선옥에게 아빠의 머릿속에 있는 혈관이 막혀서 아빠가 깨어나시지 못할 것 같다 말했을 적에도 선옥은 애꿎은 손톱만 뜯고 있을 뿐이었다. 막둥이의 마음이 다치진 않았을까 순기는 요리를 하고 재료를 다듬을 때도 선옥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손님들이 오지 않아도 순기는 식당에서 앉아 있는 법이 없었다. 닦고 쓸고 끓이고 다듬다 보면 한 명씩 두 명씩 손님이 찾아왔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선옥이 중학교에 올라가고 미자는 어느새 스물셋이 되었다. 연자는 곧 성인이 되고 동범이는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된다. 순기는 3년 동안 매일같이 오라이식당을 지켰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꼭두새벽에 출근해 늦은 저녁이 될 때까지 일했다. 순기의 첫 오라이식당은 꽤 흥행했다.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도 아니고 오피스 단지도 아니었지만 손님이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그도 그럴만한 것은 유난스런 순기의 손님 접대 능력 때문이었다. 새벽 일찍 막일을 끝내고 아침식사를 하러 오는 아저씨들에게는 먼지 묻은 손과 얼굴을 닦을 수 있도록 따뜻한 물수건을 내어주고 속이 풀릴 수 있도록 시원한 콩나물국밥에 청양고추 쫑쫑 썰어 넣어 칼칼하게 끓인 국밥을 대접했다.
얼추 점심시간이 되면 딱 미자 또래의 앳된 얼굴을 한 아가씨가 배가 남산만 하게 나온, 퉁퉁한 아저씨들과 함께 들어오곤 하는데, 이들은 오라이식당 옆 한일 유통회사 직원들이다. 아가씨가 세월이 묻지 않은 목소리로 과장님, 부장님이라고 부르며 그 퉁퉁한 남정네들을 살뜰히 챙기는데, 순기는 그녀가 꼭 딸 같아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아가씨가 물을 컵에 따르고 수저를 착착 열 맞춰 그들의 앞에 놔주면 그들은 그 젓가락으로 순기가 내어준 밑반찬들을 집어먹는다. 아가씨는 후다닥 밥을 해치워 버리는 과장과 부장 사이에서 늘 허겁지겁 밥을 떠먹지만 그마저도 다 먹지 못하고 늘 반은 남기고 허둥지둥 떠난다. 순기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언제부터인가 그 아가씨 앞에 계란말이와 조미김 같은 것들을 놔주며 천천히 먹으라고 아는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과장과 부장이라고 하는 남정네들에게는 믹스커피를 한 잔씩 타 주었다. 오늘 찬은 괜찮았는지, 간은 맞았는지, 요새는 일이 어떤지 같은 것들을 물으면 아가씨는 순기에게 알듯 말듯 고개로 인사를 하고 남은 밥을 마저 먹는다.
이런 바지런한 순기의 성미와 깔끔한 성격 덕에 오라이식당은 제법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순기는 오라이식당 아줌마로 통했다. 식당이 끝나는 저녁, 허리춤에 앞치마를 두르고 청소용 빨간 고무장갑과 고무장화로 무장을 한 순기를 보고 동네 어르신들이 "오라이식당 또 한바탕 하는구먼!"하며 웃었다. 그러면 순기는 "매일같이 하는 일인데 자꾸 그러셔~"라고 덧붙이곤 세재를 푼 물이 담긴 바가지에 들고 나와 이곳저곳을 빗자루로 박박 문질렀다. 하루 종일 구둣발에, 흙먼지에 때가 잔뜩 껴 있는 바닥을 깨끗하게 닦아 놓으면 어찌나 마음이 놓이는지 모른다. 한창 막바지 정리를 하는 순기에게 미자가 말을 한다.
"엄마, 나 내일 친구랑 약속 있어서 그러는데 나갔다 와도 돼? 식당에는 못 올 것 같아." 이번 달에만 벌써 몇 번째 나가는 미자가 순기는 미심쩍다.
"친구 누구? 너 이번 달에만 지금 몇 번째 약속인지 알기나 혀? 봄이 와서 봄바람이 들었나."
눈을 가늘게 뜬 순기가 미자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지만 미자는 괜한 얘기를 꺼냈다는 양 뒤돌아선다. 순기는 미자에게 한 소리 하려고 입을 크게 벌리다 말았다. 미자 나이 스물셋이면 순기가 영주와 혼인을 하고 이미 미자와 연자를 낳아 기르던 때다. 참 곱고 마땅히 아름다워야 할 미자의 청춘에 현실의 무게만 더해주는 게 아닐까 순기는 생각한다. '스물셋이면 미자도 이제 신랑감을 찾아야 하는 시기네. 더 늦으면 애비없이 대학도 못 나와 홀애미 모시고 사는 노처녀라고 혼사가 뚝 끊길 텐데...'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그릇을 닦는 미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순기는 어쩐지 살이 찐 것 같은 미자의 몸을 눈으로 찬찬히 더듬었다. 미자 나름의 봄이 온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