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순기 - epi. 6
문화센터에서 열리는 노래자랑 예선에 나가기 위해 순기는 오랜만에 식당 문을 일찍 닫았다. 간만에 눈두덩이에 색조화장을 하고 식당을 나서기 전 신발장에 붙어있는 조그만 벽 거울 앞에 서서 루주를 고쳐 발랐다. 어째 루주는 다시 사기 아까워서 손톱으로 파서 쓰는데 이제는 정말 하나 사야겠다며 새끼손톱으로 루주통 안쪽에 남은 연지까지 싹싹 긁어 입술에 펴 발랐다. 장미 미용실에서 가느다란 롯뜨로 만 파마머리가 죽지 않도록 곱슬한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위쪽으로 당겼다 놓기를 반복했다. 조금만 더 풍성했으면 좋겠는데... 지난 세월은 무섭게 머리카락을 가늘게 만들었고 힘없이 축 늘어지게 했다. 선옥이 사준 얇은 누빔 잠바를 꺼내 입고 순기는 식당을 나섰다. 진한 분홍의 빛이 고운 그 잠바는 순기가 특히 아끼는 옷이다. 오늘 같은 날에 문화센터에 입고 나가면 다들 깜짝 놀랄 것이라고 순기는 마음속으로 조금 웃었다. 비싸고 예쁜 이 잠바는 순기에게 항상 특별하다.
봄바람이 코를 간질이는 날에 선옥과 함께 유명한 백화점에 갔다가 이 꽃분홍색의 잠바가 여성복 코너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생전 백화점 정문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순기는 그날 처음으로 선옥과 함께 명품관들이 멋들어지게 늘어져 있는 백화점 일층의 커다란 유리 문을 밀고 들어갔다. 반들반들 잘 관리된 대리석 바닥과 들어서자마자 풍기는 달콤하고 매혹적인 향수 냄새가 마치 차원의 문을 통해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감회가 새로웠다. 영주를 잃고 억척스레 식당을 꾸리며 순기라는 이름보다 엄마로만 살아온 지난 이십 년이 아쉽기도 했다. 좋은 것, 귀한 것을 자신에게 주지 못해 미안하기도 했다. 선옥의 손을 꼭 쥐고 백화점을 구경하며 뭔지 모를 감정들이 솟아올랐다. 동범이한테 잘 어울릴 윗도리, 미자가 좋아하는 털실로 만든 꽃이 달린 모자, 보석을 좋아하는 연자에게 어울릴 팔찌 같은 것들이 눈에 밟혔다. 아직도 제 새끼 줄 것들만 고심하는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엄마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복이 주욱 진열된 층으로 올라가자 진한 진달래 빛이 순기의 두 눈을 사로잡았다. 솜이 얇게 누벼진 진한 분홍색의 잠바였다. 순기는 뭔가에 홀린 듯이 그 앞에 서서 눈으로 찬찬히 옷의 모든 부분을 더듬어 내려갔다. 그러다 비단 옷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소매 끝을 만져보았다.
"색이 어쩜 이렇게 고울까."
순기 평생 입어보지 못한 꽃분홍색의 잠바 가슴께에 메리골드 두 송이가 수놓아져 있었다. 귤처럼 진한 노란 꽃잎이 여러 겹으로 포개어져 마치 중세 시대 여성 귀족의 치맛단 같았다. '참 예쁘다. 메리골드가 이렇게 예쁜 꽃이었나.' 진달래색보다 살짝 어두운 분홍색 비닐 잠바에 샛노란 실로 수놓아진 메리골드는 잠바 자체와 선명하게 대비되어 돋보였다. 주머니 박음질 사이로 어여쁘게 뻗어들어가는 연두색 줄기는 마치 생화를 가슴에 꽂아놓은 듯하게 보일 정도로 꽃을 생생하게 만들었다. 마음에 퍽 든 그 누빔 잠바의 안쪽에서 가격표를 꺼내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 가격은 순기가 본 그대로였다. “어휴, 무슨 옷이 이렇게 비싸?” 그때 다른 매장에 있던 선옥이 돌아왔다.
"엄마 이 잠바 마음에 들어? 이쁘네."
"응. 색이 참 곱다. 근데 이런 거 있어도 입지도 않어. 그리고 시장 나가면 비슷한 거 반의 반값에 살 수 있어~"
순기는 왜인지 선옥에게 소곤닥 거리며 뒤를 돌아 딴청을 피웠다. 선옥은 괘념치 않고 매장 직원을 불렀다.
“엄마, 95 사이즈면 되지? 여기요, 이거 95 주세요.” 곧장 매장 직원에게 순기가 잡고 있던 옷을 건네고 태연하게 다른 옷들을 둘러보는 선옥을 순기는 잡아끌었다.
“아이고, 이것아! 너 저게 얼만 줄이나 알어? 빨리 가자!” 순기는 선옥의 귓가에 소리 죽여 말하곤 직원에게 “됐어요, 됐어. 네네~” 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순기의 억센 손에도 선옥의 마른 몸은 끄떡하지 않았다. 되려 순기를 붙잡아 세워 말했다.
“엄마 이 옷 마음에 들잖아. 내가 사줄게. 엄마한테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래.”
“저게 얼만 줄이나 알고 하는 소리여? 그리고 내가 저런 옷이 뭐가 필요허냐. 됐다, 필요 없어."
돌아서는 순기의 어깨를 선옥의 가늘고 살집 없는 손이 잡았다. 선옥은 단호한 눈으로 생긋 웃고 있었다. 그 웃는 눈 아래 붙들린 순기의 퉁퉁하고 거친 손이 히마리없는 선옥의 손에 꽉 붙들렸다. "엄마, 한 번만..."이라고 말하는 선옥에게 순기는 졌다. "그래, 입어만 보자. 누가 너를 말리냐." 선옥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입어본 그 분홍색의 누빔 잠바는 순기의 몸에 착 들러붙었다. 가슴 부분에 새겨진 메리골드는 작은 훈장처럼 든든했다. 순기의 몸에 꼭 맞춘 듯 알맞았다. 품이며 팔 길이, 폭닥하게 감기는 착용감이 딱이었다. 그 옷을 담은 백화점 종이가방을 가슴에 껴안고 선옥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순기는 말했다.
"우리 똥강아지가 언제 이렇게 커서 엄마 옷도 사주고... 고맙다, 선옥아." 선옥은 순기의 말에 "에이, 뭘~" 하고는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
오라이식당의 점심 장사가 얼추 마무리되었다. 순기는 손님이 나간 자리를 치우고 행주로 상을 싹 닦았다.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빨간 다라이가 가득 찼다. 설거지할 그릇들을 포개 물에 담가놓고 냉수 한 컵 가득 따라 꿀꺽꿀꺽 삼키니 뜨겁던 속이 냉기로 시원해진다.
"엄마, 있잖아... 그 앞집 사는 정호 씨 알지?" 미자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간다. "정호 씨가 엄마한테 인사를 드리고 싶다네. 언제 한 번 식당에 오라고 해도 돼?"
순기는 무슨 영문으로 앞집 총각이 자신한테 인사를 오러 온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앞 집 사는 정호 총각이라면 순기도 오며 가며 마주친 적이 있었다. 허구한 날 돌만 주우러 다니는, 일도 안 하는 총각이라 눈인사는 하지만 영 마음에 안 들던 총각이었다. 근데 미자가 왜 그 총각 이야기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순기가 미자에게 물었다.
"그 앞집에 세 들어 사는 총각? 그 총각은 왜? 그 총각이 나한테 뭔 인사를 하고 싶다는 건디?" 베일 것 같은 곁눈으로 순기는 미자를 훑어보았다. 그 후 미자가 하는 말에 순기는 기가 차 말문이 턱하고 막혀 버렸다.
"나 정호 씨랑 만나고 있어.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 엄마." 검지로 겉옷에 달린 단추를 만지작대며 미자는 더듬더듬 말했다.
"뭐? 널린 게 남잔데 네가 누굴 만나? 허구한 날 돌멩이나 건지러 다니는 놈을 네가 뭐? 너 이 계집애, 그런 놈이나 만나라고 내가 너를 애지중지 키웠는 줄 아냐!"
순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몰라도 어쩜 이렇게 모를 수가 있는지, 지금 거리만 나가도 지나가는 사람의 반이 남잔데 어떻게 미자가 그런 놈팽이같은 인간을 만날 수가 있는지 순기는 기가 차고 말문이 막혔다.
앞집사는 정호 총각은 어쩐지 밝지 않은 청년이었다. 순기네 앞집 노 씨 부부네 단칸방에 세 들어 살며 늘 고개를 푹 숙이고 구부정한 자세로 긴 머리를 늘어뜨리며 다녔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할 줄도, 넉살 좋게 안부를 물을 줄도 모르는 청년이었다. 한 번은 해물을 가득 넣어 지글지글 부쳐낸 부침개 몇 장을 접시에 담아 노 씨네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평상에서 노 씨네와 부침개에 막걸리를 먹으며 수다를 떠는 와중 정호 총각이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산에서 구르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먼지를 뒤집어쓴 행색이었다. 노 씨 부부는 늘 그렇다는 양 정호 총각을 흘금 보더니 고갯짓만 하고 그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는데, 순기는 그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아 그에게 살갑게 막걸리 한잔하자며 말을 건네었다. 정호 총각은 푹 숙인 고개에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눈인사만 까딱하더니 자기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그때 저런 총각은 누가 사위로 데려가려나 하고 혀를 끌끌 찼었다. 노 씨 부부는 정호 총각이 집세를 내는 게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한 번은 그가 한 달 내내 방을 비운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정호 총각이 도망이라도 간 건가 싶어 방을 열어 보았는데 짐은 그 자리 그대로 놓인 상태였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방 한구석 가득 줄 맞춰 선 돌이었다고 한다. 그 돌들 중 일부는 기름을 먹인 듯 광택이 났고 몇 개는 값비싼 원석처럼 아리따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 얘기를 하면서 "웬 돌멩이나 줍는 놈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는... 저 방이 돌무덤이 되게 생겼어, 글쎄!"라고 우는소리를 하는 노 씨 부부가 재미있어 한바탕 깔깔대고 웃기까지 했는데... 그래 내 업보다, 업보.
셔터를 반쯤 내린 오라이식당에는 순기의 착잡한 한숨소리와 미자의 침 넘어가는 소리만 들린다. 미자는 피부가 희고 고운, 상당히 예쁜 얼굴을 가진 참한 아가씨이다. 비록 숫기가 없고 명석한 구석이 모자라도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다. 미자를 연모해 따라다닌 총각들로, 거짓말을 보태서, 오라이식당에서부터 순기의 집까지 줄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옆집에 변호사 아들을 둔 박 씨 아저씨는 미자가 자기 아들이랑 퍽 잘 어울린다면서 이미 미자를 며느리로 점찍어 두었을 정도다. 그런데, 뭐? 돌멩이 총각? 순기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뒤이어 미자가 덧붙인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나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 엄마. 정호 씨 아기..."
그날 순기는 미자를 수도 없이 때리고 때렸다. 미자는 엉엉 울며 그래도 정호가 좋다고, 정호의 집으로 들어가 살겠다고 말했다. 언제까지 동생들 뒤치다꺼리만 하며 살 수는 없다고. 자기도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순기는 그 말을 내뱉는 미자를 때리고 또 때렸다. 어떻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도 그렇게 없냐고. 그 총각은 처자식을 먹여 살릴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미자는 순기의 말보다 자신의 선택을 따르기 원했다. 냉랭한 두 모녀는 식당 문을 닫고 눈물을 훔치고 차가운 공기와 적막만이 도사리는 거리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