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냉이 같은, 민들레 같은, 봄비 같은
지난겨울은 참 혹독했어, 그치? 눈이며 추위며, 삶조차도 쉽지가 않았잖아. 잠옷바람으로 얇은 창문 앞에 앉으면 발끝부터 찬기가 타고 올라와서 재채기가 나올 만큼 추웠는데 이제는 눈 대신 꽃비가 내리는 봄이 한창이야. 정말 지독하게 추워서 전기장판이고 라디에이터고 온갖 난방기구를 들였는데, 나는 사실 그것들보다 침대에 누워 있는 너의 옆구리 틈을 파고들 때가 가장 따뜻했어. 나의 언 발을 네 허벅다리 사이에 밀어 넣으면 얼음장 같은 내 발에 놀라 몸부림치고는 했잖아. 그러다 또 발이 이렇게 차가우면 안 된다며 심각해지는 네 얼굴을 보는 게 재미있어서 시도 때도 없이 네 살갗을 찾았나 봐. 두 손으로 내 언 발을 마주 잡고, 체온이 전해지길 기다리며 종알종알 떠드는 너를 보는 게 참 기분 좋은 일이야. 찬바람이 귓전을 때리는 날에는 어디선가 귀마개를 꺼내 슬그머니 내 귀에 씌워주는 너도 그렇고. 귀만 따뜻하면 좀 견딜만하다면서 정작 네 귀가 빨개진 건 개의치 않는 모습에 이런 게 사랑이구나 싶어. 누군가의 걱정을 소비하고 위로를 빚지고 내심 가슴 한 편이 든든해지기도 하고.
매일 잠들기 전까지 목소리로 하루를 나누니까, 편지에 뭘 적어야 할지 망설여지는 거야. 예전엔 절절한 사랑편지를 빼곡히도 썼는데 말이야. 또 어떤 번지르르한 이야기를 써야 읽는 네 마음이 동할까 싶어서 며칠 동안 고민했어. 이야기라는 게 그렇잖아. 갈등이 있어야 깊어지고 진해지기 마련인데 우리의 날들에는 그런 일이 없잖아. 울고불고 악쓰고 화내는 극적인 일들이 없어서 기승전결 멋진 편지를 쓰기가 어렵더라고. 그래서 또 가만히 생각을 해봤지. 우리 사랑의 면모들을. 조각조각 기억나는 너와 함께한 시간들을 떠올리니 웃음 밖에 안나더라. 가슴 시린 로맨스극보다 매일 저녁 방송되는 시트콤 같은 거야. 바보 같은 기억들만 한가득해서 떠올리다 보면 괜스레 웃음이 나곤 해. 이 세상에서 너와 나 밖에 알지 못하는 것들. 우리에게 관찰 카메라라도 따라붙는다면 많이 부끄러울 장면들.
말도 안 되는 노래를 열창하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나와 무시무시한 독방구를 세상에 내어놓는 너의 민폐. 비련의 여주인공 행세를 하며 기름진 닭다리를 야무지게 쥔 나의 손가락들과 빙글 웃어 보인 네 앞니에 낀 고춧가루 같은 것들. 그 헐렁한 로맨스가 어딘지 시트콤 같아서. 하긴 그래. 기름지고 느끼한 멜로보다야 김장김치처럼 시원하고 개운한 시트콤이 낫지, 안 그래?
기념하고픈 날마다 꽃다발에, 깨알 같은 편지에, 선물까지 준비하는 너에 비해서 나는 내 사랑을 증명하는데 너무 게으른 것 같아 반성했어. 네가 두 손 가득히 꽃다발을 건네주면 나는 항상 해준 게 없어 미안하다고, 다음번엔 꼭 편지를 쓰겠다고 말하지만, 번거로움을 핑계로 또 현실이 버겁다는 이유로 사랑을 보여줄 기회를 놓치고 말아. 너는 이리도 성실하게 네 마음을 증명해 내는데 말이야. 그래서 무어라 써야 할지 몰라도 늦지 않게 내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연필을 들어 편지를 써 내려가. 내게 꽃다발을 안겨주기 위해 단골 꽃집을 이곳저곳 만들어 둔 너의 치밀함을 당해낼 순 없겠지만 말이야.
이제 나의 머릿속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생각들을 알려줄게. 편지에 비밀 하나씩은 숨겨둬야 읽는 네가 가치를 느낄 테니 말이야. 요즘 나는 그런 생각을 해. 이때까지 견뎌와서 다행이다, 이런 호시절을 맞이하려고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구나, 너를 만나려고 여러 인연들을 지나쳤고 여기까지 오기 위해 단단해진 것이구나, 하고 말이야. 신과 가까웠을 적에, 그러니까 내가 어렸을 적에, 분명 신께서 나를 위해 예비해 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했었어. 그 믿음은 아주 단호해서 누군지도 모르는 그를 위해 나는 매일 기도했었지. 그가 내 존재를 알아볼 수 있길. 우연히 마주쳐도 내가 그를 놓치지 않길 말이야. 서로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어도 그가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길 신께 간청했어. 누구를 향한 기도인지도 모르면서 매일 공기 중에 흩뿌렸었지. 근데 이제 그 대상이 누구였던 건지 알 것 같아. 너였던 거야. 나는 너를 모를 적에도 너를 위해 온 맘 다해 신께 매달렸던 거야. 너의 하루가 온전하길. 우리가 만나는 순간까지 너를 눈동자처럼 지켜 주시길.
어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러브레터지? 방금 지어낸 이야기 같지만 정말이야. 나는 정말 너를 위해 매일 기도했어. 그러니까 네가 나를 이렇게나 사랑하는 거야. 아니, 이 말은 취소해야겠다. 왜냐면 내가 정말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서 사랑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듣는 게 더 좋으니까. 내가 점지한 사랑이 아니라 네가 알아본 사랑인 게 더 멋지잖아. 신이 예비한 사람. 네가 알아본 운명의 상대, 뭐 그런. :)
이 계절이 돌아오면 소생되는 푸르름에 비로소 우리의 계절이 왔구나 싶어. 그러면 나는 또 분주하게 무언가 시작할 용기를 내고 소란스러워지는 마음을 잠재우기가 어려워지기도 해. 겨울은 지루하고 지난하기 짝이 없는 회색빛인데 봄은 향긋함 천지잖아. 동네 채소가게만 나가봐도 냉이며 쑥이며 달래며, 코 끝에 매달리는 향이 어지러울 만큼 생명력 있는 계절이라 나도 다시 살아갈 용기를 내나 봐.
초봄에 채소가게 사장님의 등쌀에 못 이겨 냉이 한 움큼을 사 오긴 했는데 도대체 이 뿌리 식물을 어찌 먹어야 하나 몰라서 봉지채로 냉장고 처박아뒀었어. 검은 봉지마저 외면하지 못하겠던 날에야 다시금 그 풍성한 머리채를 잡고 끌어냈지. 내 눈엔 그저 억세고 향이 강한 뿌리로 밖에 보이지 않아서, 찌개에 넣자니 향이 싫을 것 같고 무쳐서 나물로 먹자니 질길 것 같아 에라 모르겠다 하고 팔팔 끓는 된장찌개에 넣었다? 세상에나. 그렇게나 향긋하고 맛있을 수가 없는 거야. 그 자리에서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워 버렸어. 아무런 조미료를 넣지 않았는데 달큼하고 진한 맛이 나는 게, 이게 바로 봄의 힘이구나 싶었지.
봄은 우리에게 참 많은 걸 내어줘. 아끼지 않고 내어주는 모든 것들이 다 아름답고 향기로워서 매번 봄에 경탄하는 것 같아. 털옷을 벗고 커다란 꽃잎을 피워내는 목련. 물감보다 짙은 노란 개나리. 시멘트 틈 어여쁘게 고개를 드는 민들레 같은 걸 보면 늘 즐거워. 그래서 너도 이 계절에 태어났나 봐. 봄은 아름다운 것들을 내어주는 인자한 계절이니까.
너에게 봄비 같은 소중한 순간들이 내내 가득하길 바라. 전국 곳곳에서 유난히 많은 화재가 일어났잖아. 입을 크게 벌린 화마가 아직 피어나지도 못한 어린 새순들을 집어삼키는 동안 인간은 어쩔 줄 모르고 소리만 지를 뿐이야. 그러다 내린 촉촉한 봄비에 어지럽던 불길들이 고요 속에 잠드는 걸 보고 너에게도 봄비 같은 도움의 손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 끝에 신의 긍휼이 함께하게 해달라고 기도해. 봄의 푸르름이 인간의 연약한 등에 조금의 힘을 실어준다면 우리는 지독한 겨울을 지나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야. 너에게 그런 조용한 계절의 손길이 닿길 바랄게.
물론 나도 항상 너의 손을 놓지 않을게.
2023년의 봄, 의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