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넘실거리는 - 1
물을 잔뜩 머금어 무거워진 수건은 마룻바닥에 연신 자신을 게워내고 있었다. 빨래를 널어놓은 베란다 바닥엔 작은 물웅덩이가 넘실거렸다. 한 방울이 떨어지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또 다른 물방울이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치요는 멍하니 소파에 누워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에 번호를 매겼다.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스물..."
전국적으로 천둥 번개를 동반한 장대비가 쏟아진다고 하더니 저녁부터 굵은 빗방울이 창문에 뚝뚝 떨어졌다. 덥고 습한 날씨에 속옷 차림으로 가죽소파에 엎드려 있는 치요의 허벅지와 가슴이 소파의 미끄러운 가죽에 철썩 달라붙었다. 몸을 살짝 움직이려니 살갗이 가죽에 들러붙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가슴골 사이에 땀이 고이는 게 느껴졌다. 물방울을 세던 치요는 서른 즈음에서 번호 매기길 그만두었다. 그 사이 샤워를 하고 나온 젠은 젖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털며 치요에게 다가갔다.
"치요, 이제 씻어."
"응."
치요는 소파에 끈적하게 눌어붙은 자신의 하얗고 보드라운 몸을 천천히 떼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치요의 몸을 볼 때마다 젠은 황홀함을 느꼈다. 피부가 무척 희고 은은하게 광채가 나는 치요의 살결은 언제 보아도 완벽했다. 매미가 매섭게 우는 한 여름은 치요의 완벽한 살결을 감상하기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이 계절엔 치요의 몸에서 보석 같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촉촉하게 물기가 있는 치요의 마른 어깨나 엉덩이 바로 위, 움쑥 보조개가 패어있는 허리춤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다. 적당히 탐스러운 치요의 하얀 가슴 아래서 땀방울이 또록 하고 흘렀다.
"진짜 덥네 오늘. 세탁기 아직 못 고쳤어. 내가 손으로 열심히 짜긴 했는데 저거 봐. 바닥이 흥건해. 물기 짜다 땀이 더 나서 그냥 놔뒀어."
입고 있던 연분홍색 브래지어 후크를 풀며 치요는 젠에게 말했다. 젠 옆에 있는 서랍장에서 수건을 꺼내려 치요가 손을 뻗었다. 치요의 얼굴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기설기 붙어 기하학적인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목덜미에선 가벼운 풋사과향이 났다. 커다란 타월을 집어 가슴 부분에 수건을 동여 맨 치요는 이어 입고 있던 팬티도 벗었다.
"이거 봐. 얼마나 더운지 가랑이 사이에도 땀이 다 났어. 이거 새 속옷인데..."
젠은 치요가 부리는 가벼운 수선이 좋다. 아무렇게나 묶어 올린 머리카락도, 끈끈한 목덜미에 붙어있는 잔머리도 누군가 손질해놓은 것 마냥 아름다웠다. 치요는 완벽에 가까운 인간이라 생각했다.
젠이 치요를 처음 만난 건 학교 앞 편의점 노상 테이블이었다. 기말고사 시험기간이라 도서관 앞은 학생들로 붐볐다. 아이러니하게도 열람실은 짐만 가득히 쌓여있을 뿐 한산했다. 빈 책상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낮부터 시험을 치르고 온 젠은 일찌감치 열람실 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분명 빼곡하게 필기를 해뒀는데 그 글씨가 전부 반쯤 휘갈겨져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길이 없었다. 며칠째 밤새 시험공부를 했더니 졸음이 몰려왔다. 필기를 읽다 전공 책을 읽다 다시 똑같은 문장으로 되돌아가는 짓만 이십 분째 하고 있다. 이게 과연 공부일까. 젠은 소리 없는 기지개를 켜고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텁텁한 도서관 공기 때문에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고 투덜대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졸업 학년인데도 도통 의욕이 일지 않았다. 앞길은 그저 깜깜하고 답답할 뿐이다. 편의점에 들어서니 무릎에 전공 책을 펴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이 공허한 인사를 건넸다. 냉장고 안에서 차가운 커피를 꺼내들었다.
"하... 좆같다."
정말 좆같았다. 나는 뭐가 되겠다고 대학에 온 걸까. 차라리 좋아하는 것이나 실컷 하고 그 방면으로 전문성 있게 나가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빨대로 차가운 커피를 쪽쪽 빨아들이는데 옆에 누군가 풀썩하고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위에는 두툼한 패딩을 입고 아래는 아주 짧은 반바지를 입은 슬리퍼 차림의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켜고 있었다. 빨간 입술 사이에 껴 넣은 얇은 연초는 입술을 따라 출렁거렸다.
"아, 씨발."
젠은 그 여자의 행동을 넋 놓고 바라봤다. 헝클어진 길고 검은 곱슬머리는 귓바퀴에 아무렇게나 넘겨져 걸려 있었다. 머리카락이 칠흑같이 검다고 느껴진 것은 아마도 그 여자의 창백하고 투명한 피부 때문인 것 같다. 희고 고운 피부일 뿐 아니라 실핏줄이 비쳐 보일 만큼 투명한 피부였다. 게다가 그 하얗고 맑은 피부는 은은하게 반짝거려 입자가 아주 작은 글리터를 살결에 발라놓은 건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젠은 여자에게 반한 게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생명체가 맞는지 의심이 들어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것이었다.
"라이터 있어요?"
혼이 나간 듯 여자를 바라보던 젠은 그제야 여자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는 젠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불이 있느냐 물었고 젠은 여자에게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답했다. 순간 자신이 여자를 너무 빤히 바라봤다는 사실이 창피해 서둘러 눈길을 거뒀다.
"라이터 있냐고 했지 담배 피우냐고는 안 물어봤는데."
"아, 네... 라이터 없어요."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젠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무안하진 그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뒤통수를 긁어댔다. 그런 젠의 어수룩함이 재미있다는 듯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작은 목소리로 상체를 기울여 젠에게 속삭였다.
"담배 피우는 여자 좋아해요?"
여자는 젠에게 그렇게 말하고 다시 플라스틱 의자에 몸을 기대어 키득키득 웃었다. 여자의 이름은 치요라고 했다. 치요. 무슨 뜻일까 한참을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히 연상되는 것이 없었다. 일본 이름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예전에 어떤 손님이 나보고 장사치라고 머리채를 잡았거든요. 그래서 내가 그래. 나 장사 치요, 그래서 어쩔 건데 하고 되받아쳤는데 갑자기 치요라는 이름이 너무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 사람한테 화를 내고 있었던 것도 잊어버리고 그래, 치요라고 해야겠다, 내 이름. 하고 번뜩한 생각 밖에 안 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치요라고 지었어요."
"아... 이 근처에서 가게 하세요?"
남아있는 커피 몇 모금을 쭉 빨며 젠은 치요에게 물었다.
"가게는 아니고요. 몸 팔아요."
기다란 빨대 끝에 목구멍 속으로 빨려 온 커피 한 모금이 젠의 목에 창처럼 걸렸다. 캑캑거리는 젠을 보고 웃겨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치요는 괜찮냐 물었다. 옷소매로 입가에 흘린 침을 닦았다. 얼굴이 한순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두우니까 이 정도는 보이지 않겠지, 젠은 의연한 척 행동했다.
"괜찮아요? 놀래려던 건 아니었는데. 좀... 특이한 직업이긴 하죠. 이름이 뭐예요?"
"젠이요. 지읒에 어이. 젠."
"젠? 와, 나보다 멋진 이름 처음 들었어요. 본명이 젠이에요?"
젠은 어설프게 웃었다. 사실 젠의 본명은 지극히 평범한 이름이다. 어디 가서도, 심지어 길거리에 행인을 붙잡아도 말할 이름. 하지만 젠은 본인이 젠이길 바랬다. 꽤 오랫동안 본인의 이름이 젠이라 믿고 살아오니 본명이 있었다는 것마저 가끔 까먹는 날도 있었다.
"아, 사실 누가 지어준 이름인데... 그냥 제 이름이라고 믿고 살아요."
"오, 그렇구나. 누가 지어준 이름이에요? 애인?"
"음... 애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면 애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오래된 친구가 지어줬어요."
"무슨 뜻인데요, 젠?"
"제가 자꾸 젠체한다고 젠이라고 불렀거든요. 근데 지금은 그 애가 젠이라고 불러줬을 때가 그리워서 그냥 젠으로 살고 있어요."
"그 친구는 이제 안 봐요?"
"어... 죽었어요. 4년 전에."
"어머."
"아, 아니에요. 원래 이름 얘기하면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얘기 안 하는데 왠지 치요보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줘야 할 것 같아서 꺼낸 말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젠은 비워진 플라스틱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젠과 그 애는 기억이 닿는 그 끝 지점부터 이미 친구 사이였다. 그 애는 어디든 젠과 함께 같이 가길 좋아했다. 초등학생 땐 엄마가 쑥이랑 냉이가 잔뜩 난 곳을 알려줬다며 젠을 데리고 완만한 뒷산에 올랐다. 둘은 그곳에서 맨손으로 냉이와 쑥 같은 푸성귀를 뜯어냈다. 집에 가져가서 예쁨을 받을 것도 아닌데 몇 시간이고 흙바닥에 앉아 무성한 잎들을 뽑았다. 바지 엉덩이춤이 축축해지는 것도 모른 체 흙을 만지고 있으면 땅에서 지렁이라든지 땅개미들이 올라왔다. 젠이 지렁이를 흙 속에서 쭉 뽑아들어 그 애 얼굴에 들이밀면 그 애는 백발백중 까무러치며 비명을 질렀다. 지렁이는 좋은 벌레야. 땅을 기름지게 해준다니까,라고 말하면 그걸 누가 몰라? 하며 젠체하지 말라고 그 애는 소리를 질렀다. 그런 그 애 반응이 재미있어 젠은 그 애 앞에서 항상 잘난 척을 해댔다.
그들은 초등학교만 같을 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따로 다녔지만 틈만 나면 붙어 놀았다. 중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보낼 때 부모님이 다 나가신 틈을 타 그 애는 젠에게 야한 동영상을 보자고 제안했다. 그때 당시 젠은 여느 사춘기 아이답게 이미 많은 야동을 봤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척을 하며 그 애를 말렸다. 도대체 그런 걸 왜 보고 싶냐는 말에 그 애는 이런 게 바로 참된 성교육 아니겠냐는 궤변을 늘어놓았고 그 고집을 말리다 말리다 체념한 체 함께 그 애가 고른 영상을 시청했었다. 영상이 재생되는 동안 모니터에서 반쯤 등을 돌리고 있던 젠은 가끔가다 그 애의 반응이 궁금해 흘금 쳐다보았다. 그 애는 동그랗게 뜬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는 척하면서 영상에 집중했다. 그때처럼 야동이 불결하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그 애는 약간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이내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인 양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를 견뎌내었다.
그 애가 젠이라 부르니 젠의 주변 친구들 모두 그를 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애와 젠을 아는 친구들은 그들이 틀림없는 연인 사이라 생각하는듯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연인이지 무엇이었겠나 싶지만 그때 당시 그들은 서로를 연인이라 생각하지 못했었다. 젠과 그 애 사이엔 설렘이 없었고 모든 게 그저 자연스러웠을 뿐이니까. 그들의 첫 키스도 사실 서로였지만 굳이 남에게 말하진 않았다.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그 애는 부쩍 궁금한 게 많아졌다. 키스하면 어떤 느낌인지, 남의 혀가 입속에 들어오는 것이 좋은 기분일지 궁금해했다. 연신 팔 안쪽에 입술을 대며 쪽쪽 거리던 그 애는 게임을 하던 젠에게 자신과 키스해 보지 않겠냐 물었다. 당황한 젠은 게임 속 자신의 캐릭터가 끝없는 협곡의 낭떠러지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다 소리를 질렀다.
"아, 야! 미쳤냐!"
젠 또한 키스가 어떤 기분일지 너무도 궁금했지만 갑작스레 다가온 그 애의 키스 제안은 황당하기도 하고 떨떠름하기도 했다. 미칠듯한 심장을 진정시키며 좋아하는 사람과 나누는 키스가 아니라 이런 실험적이고 일차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첫 키스를 날려버리고 싶진 않았다. 우물쭈물 대답을 미루던 젠의 입술에 그 애의 입술이 포개졌다. 살짝 닿은 그 애의 입술은 생각보다도 훨씬 말랑했고 부드러웠다. 그건 사실 가벼운 뽀뽀에 지나지 않았지만 왠지 머쓱해진 그들은 멀찍이 떨어져 딴짓을 했다.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한 번도 이성이라 느낀 적 없는 서로가 이성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 친구는 왜 죽었어요?"
치요는 걸치고 있던 패딩 앞자락을 끌어당기며 태연하게 물었다. 죽음을 말하는 젠이 담담해서인지, 치요도 한없이 덤덤한 투로 저녁은 먹었냐라고 물을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물어왔다.
"자살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