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넘실거리는 - 2
수아.
젠과 다르게 그 애의 이름은 참 예뻤다. 수아는 참 예뻤다.
수아의 머리카락은 검고 길어 그 애가 움직이면 넘실넘실 파도처럼 부딪혔다. 젠은 학교가 끝나면 항상 수아의 학교 앞에서 수아를 기다렸다. 연 파란색 블라우스에 체크무늬 교복 치마를 휘날리며 뛰어오는 수아를 보는데 어느날 심장이 쪼그라들 것처럼 두근거렸다. 말괄량이 같은 수아가 너무 신나게 뛰어오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치마가 펄럭거리도록 다리를 높이 쳐들고 겅중겅중 뛰는 수아의 치마 속이 남들에게 드러날까 또 조마조마했다. 열심히 뛰어 젠 앞에 선 수아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빙글하고 웃는 수아가 예뻐 보여서 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세차게 뛰는 심장에 컥 하고 사레가 들려서 젠은 한동안 멈추지 않는 탈곡기처럼 기침을 털어내었다. 그때 쯤일까 싶다, 수아가 젠에게 특별해진 것이.
젠과 수아는 토요일 새벽 한강변에 앉아 콜라 마시는 일을 그들만의 의식처럼 여겼다. 고삼을 목전에 둔 불운한 시한부 인생의 유일한 일탈이었다. 여름의 끝에도 뼛속을 파고드는 새벽 냉기에 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남아있는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켜던 수아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진짜 좆같아!"
"야!"
"왜!"
"제발 좀 조용히 해! 그리고 그 말 무슨 뜻인지나 알고 말하는 거야? 네가 입에 담는 단어가 너를 담는 거라고. 말 좀 예쁘게 해, 어?"
"아, 어쩌라고! 좆같은 게 좆같은 거지 그럼 뭐라고 해. 너처럼 머리 좋은 젠 선생은 인생이 좆같지 않겠지만, 나는 공부도 못하고 잘하는 것도 없어서 이미 글러 먹었다고. 엄마 아빠도 이제 내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기 시작했어. 공부해라, 어디 또 나가냐. 진짜 싫어. 오늘만 해도 그래. 뻔히 토요일에 너 만나는거 알면서 왜 그렇게 잔소린지. 차라리 혼자 어디로 영영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수아는 그걸 미성년의 신세한탄이라 했다.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몸부림이라, 마땅히 이해받아야 하는 응석이라 여겼던 건지 과하게 받아들이고 현실을 부풀려 이해하길 좋아했다. 젠은 그런 수아의 말을 잠잠히 들었다. 어느 하나가 송곳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오는 불평도 아니었다. 그들 또래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그런 푸념이었다. 젠 또한 똑같이 느끼고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수아에게는 공기 중에 자연스레 흩어지지 않는, 어쩌면 죄가 되는 씨앗이었을까.
수아의 부모는 그 애가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봄, 교통사고를 당했다. 만취한 화물차 운전기사는 중앙선을 넘어 그대로 수아 부모의 차를 덮쳤다. 젠은 아침이 되어서야 간밤에 일어난 뉴스를 보았다. 아침밥을 먹을 때 지나가듯 짤막하게 언급된 교통사고 장소가 그들의 동네 바로 인근에 있는 고속도로였기 때문에 귀 기울여 들었다 뿐이지 그저 똑같은 아침이었다. 뉴스에선 '만취 화물차, 40대 부부 덮쳐 사망' 정도의 짧은 헤드라인뿐이었다. 또 무고한 사람이 갔네. 학교에 등교해서야 그 사고가 수아의 부모의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수아는 할머니 댁으로 이사를 갔지만 그마저도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혼자 고시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젠은 늘 그래왔듯 수아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위로 한마디 쉽게 건넬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커다란 슬픔을 떠안게 된 수아에게 자신의 위로는 불필요하고 거만한 말장난일 뿐이라 생각했다. 남의 불행을 말 그대로 '위로'하려면 자신 또한 그만한 불행을 떠안은 사람이어야 하지 않냐고 젠은 매일 밤 자문 했다.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게 수아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위로였다. 수아가 좋아하는 새벽 한강변 콜라 한 잔의 위로 밖에 건네지 못하는 자신이 혐오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명랑했던 수아는 점점 말을 잃어갔다. 반짝였던 눈동자는 눈꺼풀에 늘 반쯤 덮여 빛을 잃은 채였다. 수아는 한강변에서 뱉어 낸 자신의 응석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도래한 거라 자책했다. 차라리 자신이 사고를 당했다면 어땠을까. 공부도 못하고 잘하는 것도 없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어야 하는 것인데 자신의 말 한마디에 부정을 탄 것이라고. 젠은 그렇게 우는 수아를 마주 볼 자신이 없어 주변 공기만 축내고 있었다. 아마 점점 옅어져 가는 수아의 생명력을 알아채기가 미치도록 두려워서 모른척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에 이 세상에 없다면 넌 어쩔래?"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너 어디 못 가."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내가 없어지게 되어도 너는 평생 젠으로 살아줘. 네 이름 엄청 평범하잖아. 젠이 훨씬 나아."
젠이 대학에 입학하기 한 달 전쯤, 그는 영영 수아를 잃어버렸다. 거짓말일 거라 생각하며 뛰쳐간 그곳에도, 어슴푸레한 새벽녘 한강변에도 수아는 없었다. 누군가 가슴 한 쪽을 도려내 간 듯 슬픔도, 분노도 다른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무섭도록 공허하기만 할 뿐이었다.
"제가 무서운 얘기 해줄까요?"
밀물처럼 달려드는 수아 생각에 공허해지는 젠의 눈빛을 알아차린 듯 치요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젠은 치요에게 몸을 살짝 돌려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자세를 취했고 치요는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 모습이 너스레라도 부리는 익살꾼 같아 무섭도록 밀려오던 슬픔이 제 갈 길을 잃고 흩어졌다.
"어떤 사람이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너무너무 지친 거예요. 그날따라 일이 너무 많았거든요. 씻고 저녁도 먹고 티비를 보고 있는데 자꾸 어디서 시선이 느껴지더래요. 소파에 늘어져서 티비를 보고 있는데 자꾸 자기 뒤에 흰색 실루엣이 보이는 것 같은거에요.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고. 참 이상하다, 싶어서 또 한참 티비를 보다가 옆에 흰옷 입은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서 너무 오싹한 마음이 들더래요.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한 거죠. 그 사람 혼자 살았거든요. 귀신이어도 무섭고 사람이면 더 무서운 거 알죠? 너무 오싹하기도 해서 빨리 방에 들어가서 자야겠다 하고 방에 들어가다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는데 글쎄..."
"으... 뭐예요. 나 귀신 진짜 싫어하는데..."
"글쎄 눈가에 밥풀이 묻은 거야. 밥풀이 붙어서 자꾸 흰색이 보인 거지. 크크크... 이거 진짜 웃기지 않아요? 설마 진짜 무서웠어요? 사람들이 무서운 얘기 해달라 그러면 이게 제 단골 에피소드거든요."
"와, 진짜 저는 진짜 귀신 얘긴 줄 알고. 손에 땀난 거 봐요. 아, 근데 인정할게요. 웃겼어요. 오래간만에 진짜로 웃었어요."
치요와 젠은 실없는 밥풀 이야기로 한참을 웃었다. 이렇게 웃으니 만사 근심이 사라지는듯 했다. 젠은 치요에게 마음이 갔다. 그녀의 투명하고 고운 살결도, 여유 있게 상대를 웃음 짓게 하는 그 수선도. 밤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그 편의점 테이블 앞에서 만났다. 가끔 치요가 손님을 만나러 가는 날엔 젠의 심장은 가슴팍을 뛰쳐나와 땅바닥에 펄쩍펄쩍 나동그라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치요의 그 곱고 흰 몸을 만질 더러운 새끼들 생각만 하면 역겨워 헛구역질이 일었다. 젠은 치요에게 함께 살자 했다. 학교 근처라면 조금 큰 집을 구하기에 부담이 적을 것이라고 치요를 설득했다. 다만 젠은 치요의 일을 그만두게 할 방법이 없었다. 다른 모든 이유를 막론하고 가장 큰 장벽은 치요가 그 일을 좋아한다는 거였다. 남들이 자신을 보고 홀린 듯 넋을 놓는 걸 보는 게 좋다고 했다. 큰돈을 큰 노력 없이 벌 수 있다는 것 또한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라고 자신을 변호했다.
"나는 이 일 좋아. 가끔 늙은이들이 걸릴 때도 있지만 늙은이들은 페이를 꽤 많이 쳐주거든. 젊을 때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내 몸을 아름답다 말해주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생각보다 그렇게 나쁘지 않아."
생각보다 치요의 생활 패턴은 일정했다. 젠이 아침 일찍 수업을 들으러 가는 소리를 들으면 치요는 곧장 침대에서 나와 커피부터 내려마셨다. 그러고는 간단히 씻고 천변에 나가 가벼운 산책을 했다. 그 시간은 치요에게 필수적인 공급의 시간이었다. 휴대폰은 그녀의 유일한 호객 수단이다. 그 시간에 간단한 글을 SNS에 올려두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면 금방 문의 글이 쏟아지는데,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딱 한 사람만 예약을 잡았다. 시간은 항상 저녁 8시. 하루 50분만 일하는 것이 그녀의 철칙이다. 그때까지 젠이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개고 빨래를 돌리고 몸에 로션을 바른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녀의 피부는 보기엔 투명하고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보통 사람들보다 얇고 잘 건조해져서 수시로 로션을 발라야 했다. 그녀가 항상 넉넉히 바르는 로션도 영업 수단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녀 몸에서는 항상 은은한 사과향이 났다. 땀을 흘려도, 깊은 잠에서 깨도 은은하게 퍼져오는 치요의 살냄새는 매혹적이고 신비스러웠다. 그 덕분일까. 한번 치요를 만난 손님들은 그녀를 잊지 못하고 다시 찾아왔다.
젠과 함께 점심을 먹을 겸 치요는 학교 반대쪽 길가의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학생들이 많은 대학가에선 유독 그녀가 돋보였다. 아무리 패딩을 뒤집어쓰고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입어도 마찬가지였다. 젠이 치요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녀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않는 학생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은 무례함도 모르고 넋을 놓고 치요를 쳐다봤다. 근데 왜 젠은 달랐을까. 아마도 자살했다는 그 애의 이야기 때문이었으려나.
그 애의 죽음이 부러웠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