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넘실거리는 - fin.
그날 손님은 정말 최악이었다. 일에서 돌아온 치요는 잔뜩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연초를 연달아 피워댔다. 그날 오후, 젠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와 예약 내역을 확인했다. 손님이 보낸 문자에는 고급 호텔의 주소와 정중한 어투로 보낸 인사말이 함께 담겨 있었다. 고급 호텔이라. 오랜만에 횡재했다며 치요는 기분 좋게 손님을 만나러 갔다. 꽤 준수해 보이는 외모에 멀쑥한 캐주얼 차림의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치요를 맞았다.
"치요 씨 맞나요? 들어오세요."
그 남자는 멀거니 침대 곁 테이블에 앉아 치요를 바라보았다. 여느 손님처럼 달려들어 끈적한 키스를 하지도 않고 치요의 젖가슴을 더듬더듬 주무르거나 옷을 벗기지도 않았다. 그저 치요가 앉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혹시 숫기없는 손님일까 싶어 다가가 입을 맞추려 했지만 남자는 난색을 표하며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 당황한 치요는 그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얘기 좀 나누고 싶어서요. 진영이 아시죠?"
그 남자의 벌어진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줄 치요는 꿈에도 몰랐다.
"현아 씨, 진영이..."
"현아요? 어떻게 오신 분인지 몰라도 전 그쪽이 찾는 현아 씨도 아니고 진영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요. 지금 이거 완전 영업방해인 거 알고 계시죠?
"진영이 그렇게 가고 그 애 얘기 물을 때가 현아 씨 밖에 없었다는 거 아시잖아요. 연락도 안 되던 애가 갑자기 시신이 돼서 돌아왔으니 그럴 만도요. 현아 씨가 진영이 마지막 모습을 본 유일한 사람이잖아요. 가족들한테 진영이 가기 전까지 현아 씨랑 잘 지냈다 말 한마디만 해주세요.
"씨발. 나 현아 아니라고. 진영이란 사람 모른다고. 오늘 완전 공쳤네, 씨발. 딴짓 안 하실 거면 값이나 치르세요. 아니면 저랑 하실 거예요?"
그 남자는 자꾸 현아라는 이름을 부르며 치요를 쫓아왔다. 호텔 로비까지 따라온 남자의 손을 뿌리치며 치요는 거리로 내달렸다. 씨발. 씨발. 씨발. 좆같다. 젠의 좆같다는 말을 이제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남자를 뒤로하고 달려온 게 고작 편의점이라니. 담배만 뻐금뻐금 태우던 치요는 현아라는 이름을 입에 넣어 보았다.
진영은 현아가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였다. 현아는 진영과 함께 죽기로 결심했었다. 그게 그들이 만나게 된 이유였다. 그 당시 현아에겐 현실의 일들이 너무 버거웠다. 집안의 빚, 아빠의 폭력, 엄마의 무력함. 그래서 현아는 죽기로 결심했다. 막상 죽겠다 마음을 먹으니 어떤 식으로 죽을 것인지, 어떤 것이 필요한지 몰랐다. 죽음 앞에서도 무구할 만큼 무지한 자신이 싫어 무턱대고 인터넷에 '자살하는 법'을 검색해 보았다. 그때 진영의 글을 발견했다.
3개월 후. 동반자살하실 분.
어느 대학교 근처에 위치한 진영의 집은 복층 구조의 오피스텔이었다. 천장이 높아 보통의 원룸보다 훨씬 쾌적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남자가 사는 집치고 상당히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아니, 아예 빈집같다는 생각마저 들 만큼 휑했다. 현아에게 앉으라고 권한 뒤 진영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이 죽으려고 하는 이유, 어떻게 죽을 것인지, 왜 함께 죽으려고 하는지. 진영은 자살을 목전에 둔 사람치고는 명랑하게 자신의 계획을 열거했다. 꼭 오래전부터 죽을 이유를 만들어 놓은 사람처럼 한마디도 버벅대지 않고 호흡을 많이 들이지도 않고 말을 이어갔다. 현아는 아직 자신이 진정 죽을 마음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긴장되는지 손끝이 차가워져 진영이 내어준 뜨거운 차가 담겨있는 찻잔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근데 본인 마음이 서야 하는 거죠."
진영은 자신의 계획된 죽음을 말하는 것보다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현아에 관해 물어보았다. 그녀는 어떨 때 많이 웃는지, 연애는 해봤는지, 가장 편안한 상태는 언제인지 같은 아주 개인적이고 사소한 질문들이었다. 그 내밀한 질문들을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이 저만치 멀어진 기분이 든다는 게 이상했다. 자신이 결심한 죽음은 꽤 두텁고 무겁고 어두운 것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가벼워져도 되는 걸까. 자살할 계획이 있는 사람치고 진영은 너무나 다정했다. 그에게 하나 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현아는 진영이 자신이 가져본 적도 없는 오랜 친구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꽤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도. 어차피 삼 개월 뒤에 함께 죽을 사람이라 그런가. 현아는 진영에게 호감을 느꼈다.
"근데 왜 삼 개월 뒤에요?"
현아는 말을 이어가다 말고 진영에게 물었다.
"어차피 죽을 거 삼 개월은 즐겁게 살아보고 싶거든요. 사실같이 죽을 친구를 찾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진영의 바람대로 현아와 그는 삼 개월간 매일 서로의 안부가 되어주는 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다. 술에 전 아빠가 현아에게 온갖 욕지거리를 하며 그녀의 뺨을 올려붙여도 현아는 참을만했다. 삼 개월 뒤 그녀는 진영과 나란히 이 세상을 떠날 거니까. 매일같이 집에 쫓아오는 빚쟁이들이 현아를 욕보여도, 그런 그들을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하는 엄마마저도 정말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음이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을 때는 끝없는 지옥의 굴레에 걸려든 것 같더니 죽음이 가까워진다는 생각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났다. 것도 좋은 친구와 함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에겐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결말이었다.
현아가 진영의 집에 오면 진영은 터진 그녀의 입술에 약을 발라주며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인형 뽑기도 하고 오락실에서 게임도 하는 그 시간이 현아에겐 이 생에서 맛보는 천국의 맛보기 같았다. 그와 한날한시에 함께 죽는다면 아마 천국에서도 함께 눈을 뜨리란 이상한 믿음마저 생겼다.
현아가 아빠에게 맞고 온 날이면 진영은 먼지투성이가 된 현아의 옷을 벗겨 빨래를 해주고 약을 발라주었다. 죽음이 곧이라 그런지 현아는 부끄러움도 없었다. 마치 오래도록 생활의 한편을 겹쳐 온 것처럼 진영이 익숙하고 편안했다.
현아의 곱고 흰 살결을 누군가 처음으로 아름답다 말해준 것이 그때였을 리라. 속옷 차림으로 누워있는 현아에게 진영은 네가 지금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느냐 물었다. 처음엔 자신을 놀리는 거라 생각했다. 자신은 얼룩덜룩하고 찌그러지고 부푼 헌인형일 뿐이었으니까.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결은 한결같이 쓰라렸다. 더러워. 냄새나. 불쌍해. 딱해라, 같은 경멸과 연민이 마구 뒤섞인 마음들뿐이었다.
"현아야. 너 정말 아름다워. 얼굴도 몸도 아직 피어나지 않은 어린 꽃 몽우리 같아. 넌 분명 더 아름다워질 거야."
자신에게 아름답다 하는 소리를 들으니 현아의 가슴이 난데없이 일렁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자신의 몸을 예쁘다 말해주니 속옷 차림인 자신의 몸뚱어리를 어디에라도 숨기고 싶어졌다. 왜 그런 거짓말을 저리도 선한 얼굴로 하는 것일까, 생각하면서도 단순한 칭찬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이 일그러진 모습이 더 싫어 자기혐오가 피어올랐다. 자신이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누군가의 입이 확언해 주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진영은 그런 현아에게 더 구체적으로 현아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주었다. 곱고 부드러운 현아의 살결. 가느다랗고 긴 현아의 손가락. 가볍게 올라가는 입꼬리와 잘 손질된 빗처럼 결이 예쁜 눈썹 같은 것들.
그때부터 진영을 만나러 가는 현아에게 설렘이 생겼다. 나를 아름답다 여겨주는 사람 곁에 가는 것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지. 그 사람이 못난 자신의 몸 곳곳을 예쁘게 만들어주는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얼굴에는 홍조가 피고 살결은 도드라지게 환해졌다. 현아는 삼 개월 동안 최고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현아와 함께 죽기로 한 그 바로 전날, 진영은 혼자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진영의 시신은 다음날 그의 집을 방문한 현아에게 발견되었다. 현아는 진영의 자살에 동조하고 계획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아 자살 방조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진영이 죽고서야 돌아보니 현아는 그에 관한 것을 잘 알지 못했다. 그가 가족들과 연을 끊었다는 것 외에는 그의 개인적인 고민들을 들여다볼 생각도 못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고 보니 현아는 결국 자기 자신만 사랑했던 거였다. 진영을 사랑한 것이 아닌 자신을 사랑해 주는 진영을 사랑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기 자신이 전에 없이 역겹고 무서웠다.
아직도 매일 밤 잠에 들기 전 진영의 생각이 현아의 머릿속에서 넘실거린다. 왜 진영은 자신과 함께 죽지 않았을까. 왜 진영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주지 않았을까.
"치요 어때? 치요라는 이름 말이야. 현아보다 치요가 좋을 것 같아. 내가 어릴 때 좋아했던 만화에 치요라는 애가 나오는데 현아 너 그 캐릭터랑 진짜 닮았어. 밝고 명랑하고 똑똑하고. 어딜 가나 사랑받는 엄청 귀여운 캐릭터인데 현아 널 보면 치요가 생각나. 치요. 괜찮지 않아?"
"치요? 일본 이름인가. 치요... 귀여운 것 같아, 치요! 나 죽으면 유골함에 치요라고 써달라고 유서 남겨야겠다."
진영이 현아에게 남겨 준 치요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담뿍 받을 일을 찾았다. 자신의 몸에 감탄해 줄 사람. 자신에게 영원을 약속할 사람. 하지만 발정 난 수컷들에게 영원은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주문 같은 것일 뿐 치요의 가슴팍에 부옇고 미지근하고 짭조름한 액체만을 남기고 돌아섰다.
"내 처음은 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속으로 바랬거든. 근데 알아? 그 사람이랑 나 한 번도 한 적 없다? 결국 그 사람 죽고 어떤 아저씨가 내 처음을 가져갔어. 그것도 그 사람과 하게 되면 입으려고 사둔 속옷을 입고. 으. 그 아저씨 진짜 별로였는데. 그렇게 죽을 거 나랑 한번 하고 가지. 아니면 나랑 같이 죽던가."
소름이 돋는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떠는 치요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젠은 덤덤하게 치요가 말하는 진영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진영은 치요를 더없이 아꼈던 거라고. 그녀의 발산하는 아름다움을 감히 자신의 죽음 따위로 더럽게 하지 않기 위해 진영은 그 전날 혼자 먼 길을 떠났던 것이다. 치요는 이 비밀을 알고 있을까.
새벽녘 어스름히 해가 떠오를 무렵 하늘에 드리워진 진한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치요는 젠에게 말했다. 치요는 그 색만이야말로 진정한 파란색이라고 덧붙였다. 그들은 편의점 앞 노상 테이블에서 밤을 새웠다. 죽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려던 자신들의 오랜 연들의 이야기를 실타래에 감긴 명주실을 하나씩 풀어나가듯 천천히, 더러워지지 않게 이야기했다. 치요는 입에 문 기다란 연초를 출렁이며 라이터와 또 씨름을 했다. 젠은 그런 치요를 바라보다 넘실거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