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여름의 끝자락을 쥐고
지난해 사무실에 넣어 둔 겨울 외투를 꺼내 걸쳤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에어컨 냉기에 온몸이 차가워져 목구멍마저 칼칼하다. 유리창 밖엔 햇볕이 내리쬐고 푸르른 머리채를 흔드는 나무가 보인다. 아직 여름이 문밖에 있구나. 밖은 곧 여름이 끝난다고 마지막 목청을 높이는데 나는 건물 안에 갖혀 여름을 구경하는 신세다. 창 너머 짙은 녹음을 바라보고 매미들의 남은 생을 가려내다 결국 여름이 지나가나 싶어 이윽고 서글퍼졌다. 여름이 끝나는 건 내 젊음이 끝나는 것과도 같음을 누가 알아줄까. 에어컨 냉기를 잔뜩 머금은 - 우스꽝스럽게 겨울옷을 껴 입은 - 나는 여름을 줄곧 구경하다 어느새 나의 계절이 지났음을 알았다. 이 계절에 우리는 당연히 겪었어야 했던 것들을 피하며 지냈다. 목뒤 끈적하게 흐르는 땀이라든가, 발갛게 익은 팔뚝 따위. 모래알이 낀 발톱과 샌들 자국으로 까맣게 그을린 발가락 사이.
여름을 무서워하다니 말이 돼? 여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전에 떠나야 한다.
"벌써 말복이 지났다고?"
"말복만 지났게? 입추도 한참 전에 지났어. 이제 곧 처서야. 처서 지나면 진짜 여름 끝인 거야. 한 것도 없는데 여름이 다 가버렸어."
모기의 입도 삐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나면 기세 좋던 여름 더위는 빠르게 사그라지고 겨울의 황량함이 조금씩 몰려오니까 말이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여름 바다 수영은 어림도 없어진다. 생각해 보니 올여름엔 추억이 별로 없다. 긴긴 겨울을 지나려면 뜨겁던 여름의 기억을 잔뜩 품에 안아 몸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가야 한다.
"가자, 우리. 지금 아니면 못하게 생겼어. 여름을 너무 게을리 보냈어."
새벽 4시부터 부랴부랴 몸을 움직이니 아침 8시가 되기 전 바다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바다를 가까이한 곳은 벌써 여름이 물러나려고 한다. 며칠 전 태풍이 지나간 바다는 부옇고 탁했지만 하늘만은 새파랗게 빛나 보는 것만으로 벌써 시원해지는 마음이 들었다. 바다의 윤슬은 또 어찌나 눈부시던지 눈가가 절로 시려왔다. 파라솔 아래에서 머리카락을 질끈 올려매고 비죽 튀어나온 뱃살을 수영복 아래에 감추며 옷매무새를 만졌다. 태양에 지글지글 데워진 고운 모래알들에 겁도 없이 맨발을 내디디니 헛뜨! 헛뜨!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해는 이렇게나 힘이 세다.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처럼 으름장을 놓다가 또 그늘막에 들어서면 내가 언제 그렇게 사납게 굴었냐 상냥해지는 날씨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우리의 여름은 아직 곁에 있었다.
엄마가 지금 내 나이였을 때, 그러니까 삼십 년 전 칠월의 삼십 일 날. 그 무더운 여름에 엄마는 나를 낳았다. 올해로 만 서른이 된 나는 그 사실을 새삼스레 떠올려 본다. 인터넷 검색창에 ‘1993년 날씨’를 검색해 보았다. 그해 5월에 이미 33도를 웃돌았을 만큼 무더웠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엄마가 나에게 항상 늘어놓던 투정들이 생각났다.
"엄마가 너를 어떻게 낳았는데. 네 생일이 언젠지 생각해봐. 한 여름 중에서도 한 여름이잖아. 엄마가 너 낳고 얼마나 고생을 했게? 할머니가 병원에 오셔서 병실 에어컨은 다 끄라고 하셨었어. 애 낳은 산모 뼈에 바람들면 평생 고생한다고. 막내딸 평생 뼈 시려서 고생할까 봐 엄마 발에 양말 신겨주고, 맨살 드러난 곳이 없게 몸을 꽁꽁 싸매서 얼마나 더웠는 줄 알아? 더워서 땀이 삐질삐질 나는데 뜨거운 미역국만 먹으면서...”
엄마가 이윽고 <내가 너를 어떻게 낳았는데> 스토리를 풀어놓으면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 딴청을 피우곤 한다.
“애 낳고 에어컨 쐬면 안 된대?”
“몰라. 그땐 할머니 말이 그렇다니까 그런 줄만 알았지, 뭐. 한번은 너 낳고 그다음 해 여름에 이모들이랑 할머니랑 옷 산다고 동대문 시장에 갔었거든? 옷 보따리 가득 들고 어느 식당에 들어갔는데, 엄마 머리 위에 에어컨이 나오는거야. 엄마가 너무 춥다고 오들오들 떠니까 할머니가 놀래가지고 그날 산 옷가지를 다 꺼내서 엄마 몸에 껴 입혀주셨어. 엄마는 옷가지 때문에 웬 거렁뱅이 꼴이 되었는데, 할머니는 아랑곳 안 하시고 옷을 계속 껴 입히시는거야. 애 낳고 일 년은 꼼짝없이 꽁꽁 싸매야 한다나 뭐라나… 아이고, 웃겨가지고..”
한 여름에 태어난 나는 엄마를 지독히도 힘들게 하는 아이였다. 밤낮없이 빼액빼액 울어대던 나를 들쳐업고 새벽 내내 동네를 돌아다니며 간신히 재워놔도 머리를 땅에 눕히려고만 하면 번쩍, 동그란 눈이 떠졌다고 했다. 그러고는 감히 나를 눕히려고 하냐는 듯이 으앵- 하고 귓전이 떨어지게 울어 젖혔다고 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여름에 낳은 애라 그런지 성격이 불같았다고 했다.
“그때 엄마가 너 키우다가 몸무게가 사십 킬로가 됐었어, 알아? 어우, 진짜 널 어떻게 키웠나 몰라, 정말로. 징그럽게 울던 애가 너야.”
여름마다 돌아오는 엄마의 출산 레퍼토리는 언제나 나를 겸연쩍게 만든다. 어린 내가 뭘 알았겠나. 그저 배고프면 울고 배부르고 등 따수우면 잠드는 갓난쟁이였던 것을… 돌아가신 외할머니나 이모들도 나를 봐주러 가끔 집에 오셨는데 그때마다 집이 떠나가라 우는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큰이모는 내가 너무 울기에 미운 마음이 들어 내 허벅다리를 꼬집었다 증언하기도 했다. 나를 등에 업은 할머니는 엄마 들으라는 듯이 핀잔을 줬다.
"아니, 지 애미는 순허디 순헌데 뭔 놈의 기집애가 이렇게 징허냐 그래."
그럼 또 엄마는 자기 새끼 흉보는 게 싫어 할머니 품에서 나를 빼앗아 안아들었다고 한다. 나를 낳고 몇 해 동안의 여름은 엄마에게 가혹하게 굴었다. 어느덧 나는 엄마가 나를 낳아 기르던 나이만큼 세상을 살았다. 세상물정 모르던 아가씨가 엄마가 된 여름을 나는 편히도 보내고 있다.
입추가 다 지나고서야 우리는 바다를 품에 두었다. 겨드랑이 사이, 발가락과 발바닥 사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다 햇볕에 한껏 데워진 바닷물을 가득 머금고 여름을 만끽했다. 바다에 들어온 이들은 하나같이 아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바다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아이, 어른, 애인, 가족 할 것 없이 햇살 같은 얼굴로 여름을 느낀다. 모르는 이와 몸이 부딪혀도, 물장구치던 아이의 물을 맞아도 다들 부처 같은 얼굴을 하고 웃는다. 모두가 조금 느슨해지는 그 순간이 참 좋다. 해변가에 잠시 앉아있으면 바람결에 바닷물은 깨끗이 마르고 어디선가 참을 수 없는 라면 냄새가 몰려온다. 어디냐고 고개를 돌리면 또 다른 방향에서 삼겹살과 김치를 굽는 냄새가 맛있게 퍼져오기 시작한다. 더이상 허기를 참을 수 없게 될 때가 바다를 떠날 때이다. 허벅지에 붙은 모래를 털고 일어나니 해수욕장 폐장을 알리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바다와 파란 하늘, 짙은 녹음 같은 것으로 여름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세상 곳곳의 여름은 더 지독해지고 오만해져 간다는 것을, 여름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나는 실감한다. 우리 사는 이 별은 여름이 아니어도 점점 뜨거워지고, 한때 극지를 둘러싸던 빙하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이제 너른 들판이 되었다는 기이한 뉴스가 들릴 때 여름을 미워할 일만 남은 것 같아 커다란 슬픔을 느낀다. 삼십 년 전 나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지금부터 삼십 년 후에는 넘치는 바닷물로 이 별의 많은 땅들이 해수면 아래 잠들게 될 것이란다. 그때의 나는 지금처럼 여름을 사랑할 수 있을까.
"여기 모퉁이 돌면 바로 일 거야."
발갛게 그을린 얼굴에 떨어지는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훔쳐내며 그는 말했다. 오가는 차를 피해 몸을 숨기다 고개를 드니 길게 뻗은 나무 가지들로 얼기설기 지붕을 지은 멋진 골목이 나왔다. 팥빙수라 간단히 새겨져 있는 커다란 표지석이 골목 입구에 놓여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에어컨을 틀지 않은 그곳의 커다란 나무 지붕 그늘은 바깥보다 훨씬 시원했다. 우리는 곧장 주문대로 가서 팥빙수 하나를 주문했다. 잠시후 달콤한 팥고명을 가득 올린 옛날 팥빙수가 나왔다. 우유 섞은 얼음이 굵게 갈려 양은그릇 가득 담겨 있고, 그 흔한 떡이나 젤리 하나 없었지만, 팥이 얼마나 토실토실하고 달콤한지 이내 입에서 침과 한데 어우러져 꿀떡 넘어갔다. 커다란 밥 수저로 팥빙수를 가득 떠먹으니 이가 얼얼하게 시리고 머리가 띵했다. 얼음이 녹을세라 먹어치워버린 팥빙수 그릇엔 허연 우유 자국이 숟가락을 따라 흘러내렸다.
"내가 시 한 편 읽어줄게. 들어봐."
이 사이에 낀 팥 껍질을 혀로 밀어내다 말고 나는 내내 가방에 들고 다닌 시집을 꺼냈다. 사랑하는 그에게, 사랑하는 순간이 될 지금, 좋아하는 시 한 편 읽어주고 싶었다. 여름날에 나무그늘 아래서 빙수를 먹고 여름 시를 그에게 들려주고 있으니 내가 여름에 태어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여름에 태어나겠다고 부득불 엄마 배를 남산만 하게 불려 놓은 것이 결국 이 순간 때문 아니겠나.
"여름은 항상 짧아. 사람들은 여름이 되게 긴 줄 아는데 사실 진짜 긴 건 겨울이거든. 방학도 여름방학이 겨울방학보다 훨씬 짧잖아. 아, 옛날에는 내 생일이 항상 방학에 있어서 엄청 싫었다? 학교 다닐 때 생일이면 다들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내 생일은 방학이라 다들 모른 척 넘어갔거든. 왜 내 생일은 맨날 방학이냐고 엄마한테 막 짜증을 냈었어. 나는 생일파티도 못하고 생일 선물도 못 받았는다고.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어떻게 이 여름에 나를 낳았을까 몰라. 그땐 집에 에어컨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몸도 무거웠을 건데..."
분홍 달맞이꽃이 피면 여름이 곧인 거라 설레고, 바닷물에 차가운 물살이 섞이면 여름도 끝자락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에어컨 냉기가 오싹해 우스꽝스럽게 겨울옷을 입는 가짜 여름이 아니라 차가운 바닷물에 뜨거운 몸을 내던지는 여름을 보내고 싶었노라고 나는 고백한다. 가방 하나 들쳐매고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을 건너 극적인 여름을 만나기로 했지만 막상 여름에 몸을 담가보니 이미 끝자락에 왔음을 알았다. 발끝에 감기는 바닷물은 온몸이 시릴 만큼 차가웠고 해가 몸을 숨기자마자 곧바로 어둠이 내려왔다. 볕이 무서워 선크림 칠갑을 한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말이다. 여름을 마주하기 위해 달려온 이곳에서도 여름은 빠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성격 급한 여름은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며 채비를 한다. 여름의 끝자락을 쥐고 그가 아예 떠나기 전 마지막 포옹이라도 해보자며 우리는 여름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