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좀 먹히지 않는 마음
날이 부쩍 추워져 겨울옷들을 꺼내었다. 농 안에 켜켜이 쌓여있던 옷들은 다시 꺼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가지런한 모습으로 내 손길을 맞이했다. 긴 소매 티셔츠, 니트, 코듀로이 바지와 두꺼운 원피스 등을 차례로 꺼내었더니 어느새 장롱 앞에 커다란 옷더미 둔턱이 생겼다. 겨울옷은 부피도 크고 상하기 쉬워 계절이 지날 때마다 안 입는 옷들을 따로 모아 정리하는데도 옷장엔 늘 빈틈이 없다. 옷 먼지로 퀴퀴해지는 공기 속 옷을 정리하는데 시야 모서리에 샤샥- 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아주 작은 흰색의 무언가. 잘못 본 것이겠지 하며 옆에 있는 면 티를 개다가 그것이 무릎에 툭 떨어졌다.
끼야악-!
크기는 개미보다 살짝 큰 정도일까. 기묘한 생김새에 다리도 여러 개 달리고 촉수 같은 더듬이도 달렸다. 벌레는 보기 드물게도 흰색이었는데, 더욱이 소름 끼치는 것은, 온몸에 은은하게 광택이 난다는 것이었다. 마치 진주알같이. 진주처럼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생김새가 너무나 흉측해서 나도 모르게 옷을 내던지고 소리를 꽥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벌레는 되레 놀란 듯 다시 옷 틈 사이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 벌레의 정체는 좀이었다.
오랜만에 꺼낸 겨울 면 티 곳곳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새끼손톱보다 작지만 오른 소매, 왼 소매, 옷 곳곳에 한두 개씩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말했다.
"옷에 구멍 났어. 여기도. 여기도 있다."
"응. 좀이야. 좀이 옷을 갉아먹는대."
볼품없이 구멍 난 옷에 머리를 넣으며 생각했다.
'좀 먹힌다는 말이 이런 말이구나.'
점심시간에 회사 차장님과 정신 병동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다 우울증이란 주제가 나왔다. 드라마를 못 본 나는 별생각 없이 맞장구를 쳤는데, 차장님이 이런 말을 했다. "사실은 우울증이 제일 무서운 거 아닐까요? 우울증은 멀쩡한 사람도 모든 걸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잖아요." 그리고 한참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맞아. 우울증이라는 단순한 말로 정의해버리기엔 너무 커다랗다. 그건 아마도 깊고 어두운 골짜기겠지. 마음의 병은 어느 방향으로나 갉아 먹히기가 참 쉽겠다며 왠지 그날은 조금 침울했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다섯 명 중 네 명은 수면 장애를 경험한다고 한다. 몇 달 전부터 나의 신경을 긁는 층간 소음 문제 때문에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수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일상생활도 삐걱대기 시작했고 우울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무기력과 예민함이 동시에 발현되니 자연스레 내뱉는 말, 머릿속 생각 같은 것들도 부정적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잠귀가 아주 밝아서 자다가 곧잘 깨는 편이었다. 발자국 소리, 옆집 문 열리는 소리도 잠결에 다 귓속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잠귀가 밝은 데에 비해서 천성은 예민하질 않아 스르륵 다시 잠에 들곤 했는데 요 몇 달간은 작은 소리에도 번쩍번쩍 깼다. 한밤중 잠에서 깨면 모든 감각이 아주 예민하게 곤두섰다. 고양이들의 발소리나 스크래치 소리, 화장실 모래를 뒤적이는 소리부터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든 작은 소리들이 새벽 내내 귓바퀴를 뱅뱅 맴도는데 정말 이렇게 살다가는 제정신으로 살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바짝 선 내 옆에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태연하게 잠에 빠져있는 그를 보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을 설친 며칠을 보내면 하루가 다 망가져 버리곤 했다. 한밤중에 잠을 못 자니 아침 늦게서야 잠에 들어 매번 출근이 늦어지고, 하루 종일 예민하고 졸음과 부단하게 싸우며 혀를 잘근잘근 씹다가 입병이 나기도 했다. 그에게 어젯밤 고양이들 소리 때문에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얘기하면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되묻는 것도 화가 났다.
오늘 밤은 어떻게 또 자려나 싶었던 어느 날, 그가 깊게 숨겨진 자신의 파우치를 꺼내어 안을 뒤적였다.
"오늘은 귀마개라도 끼고 자볼래?" 그가 오렌지색의 작은 스펀지 두 개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그 싸구려 귀마개라면 나도 예전에 껴봤어. 전혀 도움 안 되던데? 그리고 그거 끼고 자면 엄청 불편할 것 같아."
"아니야. 이거 귀에 제대로 끼면 진짜 잘 안 들려. 군대에서는 이거 끼고 자다가 총소리도 못 듣는다니까? 오늘 밤만 한번 껴봐."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 가벼운 스펀지를 건네받았다. 총소리를 못 듣는 건 정말 거짓말이다 생각하며 귀마개를 대충 눌러 귀에 끼우니 그가 날 멈춰 세웠다.
"그렇게 쓰는 거 아니야. 이리 줘봐. 이걸 따뜻한 체온으로 주물주물 해서 부드럽게 만든 다음에 손으로 꼭꼭 눌러서 얇게 만들어야 해, 이쑤시개 모양으로. 자, 이리 와봐. 내가 끼워줄게."
남이 끼워주는 이쑤시개 모양 귀마개라니. 얘기만 들어도 소름이 끼쳐 질겁하며 몸을 비틀었더니 그는 그새 내 귀에 그 이쑤시개를 쑤셔 박았다. 얼마 후 이쑤시개만 했던 귀마개가 귓구멍에서 몸집을 키우더니 귀에 들리는 건 내 심장소리밖에 없었다. 침을 삼키면 꾸울꺽 하고 목구멍의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였다. 내 안의 소리가 훨씬 더 크게 들리니 이거 바깥소리만큼이나 성가실게 뻔하다 생각하며 귀마개를 끼고 처음 잠에 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다음날 아침 8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진짜 이거 총소리도 막겠어! 어제 아무 소리도 못 듣고 완전 푹 잤어, 오랜만에!"
그날 이후 다양한 귀마개 시도해 보고 좋은 안대도 구매했다. 잠에 돈을 써보는 것은 난생처음이었지만 몇 달 만에 단잠에 빠진 그날 나는 마치 사탕을 처음 맛본 아이처럼 이것저것 뒤지며 맛있는 사탕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길고 긴 잠과의 사투가 이렇게 간단하게 종료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숙면에 들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한다. 가장 먼저 화장실에 한번 다녀와 새벽녘에 소변 때문에 깨지 않도록 하고 이어 손을 씻고 핸드크림을 넉넉히 바른다. 또 건조해지는 날씨에 수시로 트는 입술이 답답할 만큼 립밤을 짙게 펴 바른다. 번들거리는 입술로 침대에 올라 베개 아래 비밀스레 숨겨 놓았던 귀마개를 꺼내든다. 그리고 귀에 넣기 전, 따뜻한 손으로 귀마개를 조물조물 주무르며 '오늘도 깊은 잠에 빠질 수 있게' 같은 주문을 외우곤 한다. 마지막으로 안대까지 푹 눌러쓰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자리에 누워 그에게 잘 자라 인사를 건네면 끝이다. 돌아오는 대답은 귀마개 때문에 잘 들리지 않지만.
이렇게 매일 안대에 귀마개까지 쓰고 잠들 준비를 하면 가끔 내가 너무 유난스럽게 느껴지곤 한다. 스펀지 덩어리로 귀를 가득 채우고 얼굴의 반을 가리는 안대를 푹 눌러쓰면 모든 감각을 차단한 기분인데, 어느 날엔가 내 뒤로 침대에 몸을 뉘는 그에게 모든 수면 장비를 장착한 내가 물었다.
"혹시 나 너무 유난스러워 보여?"
"음.. 약간?"
그 대답을 듣고는 지금 내가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 보았다. 잠에 필사적으로 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는 히스테릭한 한 여자의 요란하고 유난 맞은 징크스 탈피 과정 같지 않을까? 그날 나는 잠을 준비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깔깔깔 웃다 잠에 들었다.
올해 내 마음은 단단한 반석이었다가 아주 얇은 유리장이었다가 갓 구워진 도자기였다가 혀가 달라붙는 얼음이기도 했다. 여름이 지나고부터는 계속 끓고 식고를 반복하며 어느 쪽에도 붙지 못할 상태가 이어졌었다. 글도, 책도, 사람과 인연도 없는 곳에 홀로 외롭게 지내다 오는 날이 많았다. 하고 싶은 것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올해도 어느새 끝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 사이에서, 어찌할 수 없는 조건들 탓을 하며 애쓰지 말자, 노력하지 말자 염불 외듯 살아온 올해가 많이 아쉽다. 마음을 비우고 욕심도 버리면 우울도, 무력감도 다 사라질 거라 믿었는데 그건 나의 게으른 핑계일 뿐이었다.
좀이 겨우내 옷을 갉아먹어 옷들에 작은 구멍들이 하나 둘 생겼다. 옷을 입다 그 구멍에 손가락이 들어가고 발가락이 들어가 처음엔 손톱보다 작았던 구멍이 점점 커져 옷이 우스꽝스러워졌다. 좀이 먹은 곳은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인데 어쩐지 계속 커지는 구멍을 보니 갉아 먹힌 내 마음을 보는듯했다. 그동안 나는 좀 먹히는 마음을 모른척해왔다. 괜찮아질 거야, 다 나아질 거야 따위의 달콤한 말들을 발라봐도 소용이 없었다. 구멍은 메워지지 않고 점점 더 커져갈 뿐이다.
내 귀에 싸구려 귀마개가 쑤셔 박히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단잠의 세계처럼, 이제는 뭐라도 해봐야 변하지 않겠는가. 싸구려 귀마개라든가, 유난스러운 것들을 몸에 치렁치렁 걸어라도 봐야 나는 좀 먹히는 것들에서부터 멀어질 수 있을 거다. 새해에는 마음을 지키자. 내 마음이 좀 먹히게 두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