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내 이름은 호미 - 上
지금 시각 오후 6시 52분.
이윽고 멀리서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난 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멀리서도 알아차릴 수 있다. 투덕투덕. 땅에 발을 딛는 소리가 유난히 묵직한,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빠른 박자의 걸음걸이. 그녀의 발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것을 진작에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모른 척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눈을 감고 턱을 괴고. 무심하게 소파에 누워 그녀가 현관문을 열기를 고대한다.
띠띠띠 띠띠띠. 따리라리 따라리-.
한겨울의 냄새가 잔뜩 묻은 그녀가 집에 들어온다. 그녀는 머리 위 눈을 털고 끼고 있던 장갑을 벗는다. 바깥이 얼마나 추운지 그녀의 두 뺨이 복숭아처럼 발그레 해졌다. 쿡... 귀엽다. 나는 그녀를 가자미눈으로 슬쩍 훔쳐본다. 그녀는 입고 있던 외투와 목도리를 벗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소파에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고 다가온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기척을 느꼈다는 듯 자연스럽게 몸을 뒤척였다. 사실 내 심장은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음에도... 내가 이렇게 점잔을 빼는 이유는 한 가지다. 그녀의 부드럽고 청량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러주길...
"호미이이~~"
내가 인간이라는 족속과 함께 살기 시작했던 것은 3년 전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이제 막 추위가 시작되는 늦가을 즈음이었다. 길 생활이 험한 스트릿 고양이들에겐 치명적인 계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날 나는 직감했다. 낙엽이 뒹구는 어느 공원, 나는 혼자였다.
내가 속했던 조직, 대구 갱캣츠*는 대구 일대에서 싸움에 일가견이 있다 손꼽히는 고양이 형님들이 대거 포진된 길 고양이 조직이다. 갱캣츠는 전국적으로 많은 지부가 있는 거대 스트릿 캣츠 조직이지만, 전국에서도 단연 경상권 지부들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갱캣츠의 보스가 바로 이 대구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조직에 입단했을 때 체구가 작고 어렸던 나는 대구 갱캣츠 소년부에 속했었다. 하지만 나의 민첩하고 매서운 냥냥 펀치와 또래들에 비해 눈에 띄는 두뇌회전 덕에 '미래 갱캣츠의 우두머리는 곡괭이지.'라고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아, 다들 나를 '곡괭이'라 불렀다. 아마도 그건 한번 찍은 상대를 절대 놔주지 않는 살벌함 때문이겠지. 후후..
그 당시 나의 임무는 공원에 오는 인간들에게 귀여움을 선사하여 길 고양이들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동네 고양이에 걸맞은 명성을 얻어 예쁨을 받는 것이었다. 이건 길 고양이가 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길 위에서 먹고 자는 고양이들에게 인간들은 가장 치명적인 존재이자 매우 필수적인 존재였다. 그들이 우리 같은 길 고양이를 더러운 미물로 여기는 순간 우리의 운명은 매우 암담해진다. 먹을 것에 독약을 타고, 쥐덫을 놓고... 예전에는 아주 많은 길 고양이들이 포악한 인간들에게 잡혀 목숨을 잃었었다.
그래서 갱캣츠 조직원들은 전략을 달리했다. 우리의 이 귀여운 외모를 사용해 인간들에게 호감을 얻는 것. 인간들이 우리를 친근하게 여길 수 있도록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호감을 얻는 것이란 먹을 것과 쉴 곳을 보장받는 것과 같다. 그들의 환심을 사면 길에서의 생활이 훨씬 더 쉬워지는 걸 아는, 나같이 똑똑한 고양이는, 길 생활 중 가장 공을 들여야 할 것으로 인간을 꼽는다.
그날 나는 급격하게 불어온 한파에 꽁꽁 언 몸을 녹일 곳이 필요했다. 금방이라도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질 것 같은 날이었다. 공기는 물기를 가득 머금었고 바람이 더해지면 몸을 가누기도 힘들 만큼 가혹한 추위가 찾아왔다. 까맣고 말랑한 내 젤리는 차가운 아스팔트에 쓸려 거칠거칠 해졌고 공원을 돌아다니는 인간들도 없어 며칠 동안 얻어먹은 게 하나도 없었다.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때 어디선가 따스한 온기가 불어오는 걸 느꼈다. 봄처럼 인자한 온기에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언 발을 내디뎠다. 어딘지도 몰랐다. 그저 온몸을 딱딱하게 휘감던 긴장이 스르륵 벗겨지는 것만 느꼈을 뿐...
"어머, 오빠! 여기 봐! 빨리빨리. 차 뒷좌석 아래쪽! 아기 고양이 들어갔어, 안 보여? 저기 끝에. 어떻게 해. 우리 이제 가야 하는데.. 우리가 꺼낼 수 있을까?"
"엥? 고양이가 차에 들어간 거야? 아니, 뒷문이 열려 있었나? 아, 아까 차 문 열어놔서 들어갔나 보다. 아이고.. 근데 쟤 엄청 귀엽게 생겼네, 크크.. 눈이 어쩜 저렇게 동그랗냐.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우리 이제 가야 해, 나비야. 이리 나와봐, 어서! 나비야! 아휴, 어쩌냐. 트렁크도 짐 때문에 못 여는데..."
따뜻한 온기에 이끌려 내가 들어간 곳은 문 열린 봉고차 뒷좌석이었다. 두 인간들이 성가시게 내 몸을 잡으려 해서 자꾸 안으로 피하다 보니 트렁크와 좌석 틈바구니, 그것도 아주 구석진 자리에 누워있게 되었다. 한참을 인간들과 실랑이하다 이윽고 봉고차 문이 닫히고 자동차 시동을 거는 인간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저 고양이 어떡하지.. 오빠네 부모님 고양이 싫어하시지? 나도 자취방이라 키울 수가 없는데... 근데 저 고양이가 우리 간택한 거야? 큭큭.. 나 간택 처음 당해봐. 아까 잠깐 얼굴 보니까 엄청 귀엽게 생겼더라."
"그러니까 진짜 귀엽더라. 눈이 그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 같았어. 아, 너무 귀여운데 집에 데려가면 부모님이 분명 도로 갖다 버리고 오라고 할 텐데... 아, 내 친구한테 한번 물어볼까? 호열이는 맡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임시보호라도 할 수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저 인간들이 지금 무슨 대화를 하는 건가. 내가 왜 그들을 간택했다 생각하는 건지. 나는 그저 따뜻한 곳을 찾아왔을 뿐인데. 그리고 몇 분이 지났을까. 봉고차 인간들은 나를 안아들고 어느 건물로 올라갔다. 그들의 손을 뿌리치려 그들이 하는 말소리를 따라 했지만 오히려 나를 귀엽다고만 하는 것이 아니겠나.
참나. 이봐! 나 대구 갱캣츠 곡괭이라고! 이거 놔! 놓으라고!
그렇게 봉고차 인간들에게 벗어나려 있는 힘을 쏟다 정신을 차려보니 멀대 같은 한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인간의 몸은 전봇대 같았다. 키가 엄청 컸다. 생김새는 평범한 안경잡이. 그날이 나와 그 멀대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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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갱캣츠는 제가 만든 허구의 스트릿 캣츠 조직입니다. 우하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