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내 이름은 호미 - 下
멀대는 어리둥절해 보였다. 봉고차 인간들은 나를 멀대에게 넘기고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나보고 이 멀대랑 같이 살라는 건가. 얼결에 같이 있게 된 멀대와 나는 각자 방 모서리를 차지하고 경계의 눈빛을 나누었다. 그러다 퍼뜩 뭔가 생각난 모양인 멀대는 이 작은 원룸에 나만 남겨두고 급히 어딘가로 나갔다. 멀대가 나간 사이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째서 나는 이곳에 오게 된 것일까, 그래도 추운 계절을 버틸 수 있는 집이 생겨 다행인 건가'와 같은 복합적인 생각들. 몇 분이 지났을까. 멀대의 손에는 싸구려 고양이 사료가 들려 있었다. 남자 인간인 것도 모자라(고르자면 난 여자 인간을 선호한다) 맛없는 사료를 사 오는 인간이라니...!
"이야오옹! 냐냐아에옹! 그오옭이야냐옹!" (그 사료라면 이미 먹어봤어! 난 그거 절대 안 먹어!)
멀대는 고양이에 대해 얼마나 아무것도 모르던 인간이었는지, 나에게 용변을 보라고 강아지용 배변 패드 같은 것을 구석에 깔아주었다(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그런 곳에서 용변을 본 적 없는 나는 화장실을 찾다 급한 대로 바닥에 있는 비닐봉지 안을 뒤적여 오줌을 눴다(그 방법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광경을 본 멀대는 경악을 했다.
"야야야! 안 돼! 왜 멀쩡한 배변패드 놔두고! 으악! 안 돼 안 돼-!"
"에옹! 에이오옭 니야에옹!" (뭐! 난 모래가 아니면 바닥에서 오줌 안 싼 단 말이다!)
멀대의 구겨진 미간을 보곤 침대 밑으로 도망을 쳤다. 어떤 끔찍한 일이 기다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느껴졌기 때문에. 하지만 절망적이게도 멀대가 나를 잡아 안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나를 물이 축축한 화장실에 내려놓았다. 그날 나는 묘생 가장 수치스러운 '목욕'을 당해야만 했다. 멀대는 따뜻한 물에 나를 적셔 놓고 이곳저곳 비누칠을 해대기 시작했다. 고양이에게 물이란 적과 다름없다. 그날 이후, 멀대는 서둘러 고양이 용품들을 집에 들여놓기 시작했고 나에게 호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호미라니.. 나는 갱캣츠 소년부 우두머리 곡괭이라고!
"내 이름이 호열이니까, 너는 호미 해라. '호'자 돌림으로. 어때? 뜻은 큰 꼬리야. 클 호, 꼬리 미. 꼬리가 아주 긴 너에게 찰떡인 듯. 어때, 괜찮지 않아?"
"니아야오오옹! 갸가그으륵오옥옭!" (난 곡괭이란 말이다! 호미라니 나의 위상과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너도 맘에 든다고? 히히.. 역시 호미가 딱이야!"
작명 센스부터 내 신경을 긁어대던 멀대 집에 어느 날 여자 인간이 놀러 왔다.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간인데... 누굴까? 동그란 안경을 쓴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손등을 내밀었다. 고양이에게 어떻게 인사하는지 아는 인간이라니...! 숱한 인간들을 만나보았지만 이렇게 예의 있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다들 나를 만나면 다짜고짜 내 몸을 잡고 들어 올리거나 버릇없이 내 불주먹 젤리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당최 고양이에 대한 예의라곤 없는 게 멀대 집에 오는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처음부터 나에게 정중히 자신의 냄새를 내보였고 내가 그녀의 냄새에 익숙해지게 한 후에서야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살짝 쓸어올렸다. 그 보드라운 손길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하늘과 약속했다. 그녀를 나의 여자로 만들겠다고.
이런 나의 다짐에 훼방 놓듯 멀대가 그녀의 연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밤마다 그녀와 긴 통화를 하고 히죽히죽 거리며 내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멀대가 집에 머무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다. 가끔은 그녀가 집에 찾아오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나 혼자 집에 있었다. 그녀를 뺏긴 것도 억울한데 나를 방치하다니...! 그러던 어느 날, 멀대는 고양이 이동장에 나를 넣더니 택시를 탔다.
"삼덕동으로 가주세요." 어딘가 가는 모양이었다.
도착한 곳은 아주아주 넓은 집이었다. 커다란 소파가 거실에 놓여 있고 동그란 식탁과 의자도 있다. 멀대의 집은 작은 침대와 집에 반을 채우는 커다란 냉장고만 존재했는데... 여기는 햇볕도 아주 잘 드는 높은 집이었다. 내심 이곳이 마음에 들었지만 역시 낯선 공간이니 경계 태세를 늦출 수 없다. 잔뜩 긴장한 채로 털을 바짝 세우고 이동장에서 슬며시 나왔다.
"호미! 어서 와, 여기 우리 집이야. 호미는 처음 오지? 호미가 맨날 집에 혼자 있으니까 내가 호열이한테 우리 집으로 데려오라고 했어. 어때? 원래 집보다 넓고 좋지?"
세상에. 그곳은 내가 사랑하는 그녀의 집이었다. 이 달콤한 향기, 따뜻한 온도. 커다란 고양이 화장실부터 기다란 스크래처까지. 부족할 것 없는 공간이었다. 그날이 아마 나의 묘생 가장 행복한 날이 아니었을까. 나는 비로소 그녀와 함께 살게 되었다. 넓고 커다란 집. 아름다운 나의 그녀가 사는 공간. 꿈만 같다.
"호미, 근데 소개해 줄 친구가 있어. 이쪽은 오트라고 해. 아직 태어난 지 한 달밖에 안된 아기 고양이야. 호미가 엉아 고양이니까 잘 가르쳐 줘. 서로 인사해!"
방 안쪽에서 아주 조그만 고양이가 비틀비틀 걸어 나오다 나를 보고는 겁을 먹은 듯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이윽고 내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하더니 내 엉덩이 냄새를 맡으려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런.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다. 가르칠게 한두 가지가 아니겠다. 그렇지만 오트라는 고양이는 꽤 귀여웠다. 길 생활을 해보지 않은 탓인지 정말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말하는 것이 꼬맹이에겐 곧 진리였다. 깨끗하게 그루밍하는 법도 모르는 꼬맹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다행히도 꼬맹이는 내가 아주 마음에 든 눈치였다. 조그만 발로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나를 아주 잘 따랐다.
이것이 나의 가족인가. 길에서 지낼 때는 전혀 알 수 없었던 따뜻함이다. 그녀는 매일 아침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허리를 숙여 눈인사를 하는 법을 알고 나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는 그녀를 만난 건 운명이다. 비록 멀대 같은 그놈을 그녀 곁에서 떨어뜨려 놓을 수 없다는 것은 아쉽지만, 그녀와 꼬맹이, 멀대까지 한 집에 있는 시간이 나에게는 소중하다. 이번 연말도 따뜻하겠다.
"호미이이- 잘 있었어? 나 보고 싶었지!"
"아야냐냐냥냐- 워어오올워-" (당연히 보고 싶었지. 밖에 많이 춥지?)
"호미는 좋겠다, 회사도 안 가도 되고. 하루 종일 이렇게 따뜻한 소파 위에서 잘 수도 있고~."
"월오옭오오오아야냥- 미야냐냐아어옭-" (그렇게 말하면 서운해. 나도 당신 기다리느라 날마다 지루한 시간을 견뎌낸단 말이야.)
추운 겨울이 또 지나간다. 길 위에 살던 때 겨울이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겨울은 따뜻한 계절이다. 그녀와 꼬맹이, 멀대가 있는 이곳이 나에게는 집이다.
내 이름은 호미다.
<내 이름은 호미>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