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망하든, 망하지 않든
매일 아침, 나는 천이백 원짜리 싸구려 커피를 산다. 사 마신다기보단, 일종의 의식처럼 사 들고 온다. 아이스보다 뜨거운 커피가 더 좋은 이유는 값싼 원두 특유의 느끼하고 매캐한 기름맛이 뜨거움에 조금 가려지기 때문이다. 커피를 사 오는 십 분 동안, 나와 같은 여러 직장인들을 마주친다. 발을 동동 구르며 만원 엘리베이터에 몸을 구겨 넣는 사람, 출근 후 연초를 태우러 가는 사람, 대량의 모닝커피를 픽업하는 사람. 커피를 사러 가며 나도 은근슬쩍 그들 사이에 낀다. 긴장된 미간으로 바쁜 직장인 흉내를 내기도 하면서.
익숙한 길을 지나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피를 주문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종이컵이 나온다. 하얀 입김이 구름처럼 뿜어져 나오는 추운 날, 데일 것처럼 뜨거운 커피 한잔을 들고 걸으면, 착실하게 일 인분의 삶을 사는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다.
이 년 전부터 였던가.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았고, 회사에서 하는 일은 그것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매일같이 고민했다. 나에게 돈이란 뭘까. 꿈이란 뭘까. 직업이란 뭘까. 내내 갈팡질팡하다 어느덧 사 년 차 직장인이 되어버렸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나의 심경엔 여러 변화들이 생겼다. 근근이 생존할 정도의 돈만 벌어도 괜찮을 것 같았던 이십 대 때와는 달리, 지금은 다달이 들어오는 월급 없이는 안될 것 같다. 사 년 전, 가슴속 패기와 열정이 가득하던 젊은이는 온데간데 없다. 들어놓은 적금은 젖을 달라 뻐끔거리는 아기 새처럼 당장의 돈을 낚아채가는데. 나는 결혼도 하고 언젠가 아기도 낳고 싶은데. 그러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잘리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은 살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고 한숨을 푹푹 쉬는 월급쟁이만 있을 뿐이다.
며칠 전, 회사에서 전 직원 모두 회의에 참석해달라는 대표의 전달사항이 내려왔다. 회의실에 모이기 전, 직원들이 웅성거렸다. 별일 아닐 것 같은데? 지난번에도 이상한 말만 했잖아. 그러게, 오늘은 또 무슨 말을 하시려나. 회의실에 가득 찼던 웅성거림은 대표의 첫 마디가 떨어지는 순간부터 점점 잦아들었다. 길어지는 말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고개를 숙였고, 볼펜을 돌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몇 년 전부터 지지부진한 성과와 침체된 업계, 선로가 막힌 투자 등 많은 이유로 회사의 앞날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 짐작했지만, 그날이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오늘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무거운 공기만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연봉 동결은 당연하고 최악의 상황엔 인원 조정이 있을 수도 있다고 듣게 되니, 그 당사자가 내가 되지는 않을까 숨을 죽이고 눈을 피하게 되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회의가 끝나고 눈앞에 많은 것들이 오고 갔다. 매월 빠져나가는 비용들이 어른거리고, 때마다 나가던 해외여행이, 계절마다 샀던 옷가지와 가방들이 어른거렸다. 명절마다 호기롭게 꺼내었던 부모님 용돈도 없다. 풀이 죽은 채 동료와 이야기를 했다. 급하게 백수가 된다면 최저시급 만원 시대에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며 쓴웃음을 지으며 농을 쳤다. 내가 물었다.
"어렸을 때 무슨 알바 해보셨어요? 저는 알바 경험이 별로 없어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한 동료가 말했다.
"전 알바 많이 해봤어요. 마트에서 샴푸도 팔고 장난감도 팔고. 그때 나름 쏠쏠했는데." 범상치 않은 그녀의 과거에 민둥한 김장무처럼 앉아 있던 나는 눈을 반짝였다.
"샴푸 알바요?" 나는 놀라 눈과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마트에서 샴푸 파는거요. 그때 마트에서 묶음으로 끼워 팔고 그랬잖아요. 흰색 스커트에 세라복 같은 상의 입고... 지금 생각하면 웃긴데, 그때 샴푸 알바들은 다 그런 거 입었어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얘기하는 그녀지만, 나의 상상력은 곧바로 자극되었다. 상상 속 나는 벌써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진동을 하는 식품 코너 앞을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생활용품을 파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두루마리 휴지가 산처럼 쌓여있는 코너를 돌면 코에 맴돌던 아래층의 기름 냄새는 사라지고 화사하고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살살 간지럽히기 시작하는 샴푸 코너가 나온다. 그곳에서 하얀색 세라복에 테니스 스커트, 흰 니삭스를 입고 한 뼘은 될 것 같은 굽 높은 운동화를 신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샴푸 코너에는 다양한 기업에서 나온 판매 사원들이 있었다.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그 이름들 중에서도 그녀는 케라시스의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여쁜 그녀의 꽃다운 시절, 그녀가 샴푸 코너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상상을 하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미소 짓는 내가 수상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머릿속 그녀는 이미 샴푸의 요정이 되어 있었다. 아리따운 전직 샴푸의 요정에게 샴푸를 판매하는 일은 어땠는지 물었다.
"마트 텃세 알아요? 처음에 알바를 갔는데, 엘라스틴 언니가 나한테 얼마나 텃세를 부렸는지 몰라요. 마트마다 다르긴 하다는데, 그 마트에서는 샴푸 사려는 손님이 자기 제품을 만지지 않는 이상 말을 걸면 안 된다는 거야. 무슨 그런 룰이 있대요. 나는 처음이니까 당연히 몰랐지. 내가 먼저 손님한테 말 걸었다고 그 언니들이 얼마나 혼을 내는지! 그래서 처음엔 풀이 좀 죽었어요. 마트 텃세가 진짜 장난 아니에요."
나의 물음에 오래된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는 듯한 그의 표정은 무릇 진지했고 조금 달떠있었다. 샴푸 판매 직원들은 화장실에 갈 때도 눈치를 살피다 서로 엇갈리게 갔다고 했다. 경쟁 직원이 없으면 독점 판매가 가능하니 모든건 눈치였다. 그렇게 혼자 판매를 할 때면 샴푸를 구경하는 손님들을 사로잡기 위해 요정은 좀더 후하게 나왔다. 오늘 케라시스 샴푸 두 개, 린스 하나 세트로 구매하시면 샘플 두 배로 챙겨드려요! 두 세트 하시면 샴푸 리필 하나 공짜! 손님들을 회유했다.
"물론 그건 내가 쉬는 동안에 다른 쪽에서 벌어지는 일이겠지만은." 전직 샴푸 요정은 말한다.
샴푸 알바로 일했던 날을 돌아보는 그녀의 눈은 아까와 달리 활력이 가득했다. 몇 시간 동안 서서 여러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시절이 자랑스러워 보였다. 샴푸를 한 개도 판매하지 못한 날엔 괜히 울적하고 시무룩한 마음이 들고, 또 운이 좋아 다른 사람보다 많이 판매할 때는 우쭐한 마음도 드는 게 사람이라는 걸 그녀는 덤덤하게 말해주었다. 그 말을 내뱉는 그녀가 내 눈에 아주 크고 깊은 사람처럼 보였다.
막막한 앞날이 걱정스러워 흰소리도 늘어놓지 못하는 며칠이 지났다. 근심 속에서도 그녀가 들려준 샴푸 판매 일화가 멋대로 머리에서 반복되었다. 나는 마트에서 샴푸를 팔아본 적이 없다. 다른 어떤 것도 팔아본 적이 없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어려서부터 내 힘으로 돈을 번 적도, 힘들게 무언가를 이뤄온 경험도 없다. 그래서인지 뭐든 부딪히기 전엔 겁부터 난다. 그래서 누군가 '나는 예전에 이런 일도 했었어. 저런 일도 해봤지.'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 인생이 너무나 밋밋하게 느껴진다. 커피 한잔에 우쭐한 직장인은 꿈도 꿔본 적이 없는데 또 밋밋하게 살아가고 말았다.
월급쟁이가 된 나는 도전과는 멀어졌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실패가 두렵지 않은 싱싱한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싸구려 커피 한잔 들고 피곤한 기색을 훈장처럼 가지고 다니는 직장인 나부랭이가 되어버렸다. 입으로는 무슨 일이든 겁내지 않고 도전하며 살겠노라 말하면서도, 나는 마트에서 샴푸 파는 일조차 겁이 난다. 당장 회사가 망하면 내 세상은 무너진다는 결론을 내리고 며칠 째 우울했다. 월급의 아늑함에 나는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고상한 삶을 원하기에 망하는게 무서웠다.
나는 이제 겁내지 않기로 했다. 당장에 실직자가 되어도 나는 망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날이 인생을 바꾸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배우고 싶던 것들을 배우고, 도전하지 못했던 것을 도전하며 밋밋한 삶에 색을 덧입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큰 위기가 고작 다니던 회사가 망하는거라니. 다시 생각해보니 자기 연민 최고인듯 하다. 이러다 어쩌면 마트에서 샴푸도 팔아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아직 우리 회사는 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망하더라도 뭐 어떤가. 회사가 망하는 거지 내 인생이 망하는 건 아니다.
나는 대단한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마치 모든게 끝날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 자리에 감사하다. 천이백 원 싸구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일상에 감사하고, 혹여 그렇지 않은 일상이더라도 감사하다. 망하든, 망하지 않든 나는 착실히 삶을 살 것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