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Bastard, baby
epi. 2
해가 뜨겁던 점심시간 운동장 그늘에 앉아 P와 M이 나를 앞에 두고 옥신각신했다. 본인들 중 누가 먼저 나의 연애를 알게 되었냐며 나에게 소리를 높여 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입안의 혀만 굴릴 뿐이었다. 나와 그 애의 관계에 대한 모든 언급이 부끄러웠다. P와 M은 하이 스쿨 1학년 때부터 그 애와 한 학급이라 이들은 지난 3년간 매일같이 봐온 사이이다. 그런 그들에게 나와 그 애의 열애설은 꽤나 큰 가십거리가 되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한낮에 우리는 심각하게 앞뒤를 따지다 서로를 간질이고 놀리며 웃어 버렸다. 그들이 소란스러운 것처럼 내 마음도 쉬이 잠잠해지지 않아 당황스러운 며칠을 보냈다. 사랑이란 건 이런 걸까.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자꾸만 딴생각이 들고 혼자서 배시시 웃음이 나는 게 내가 사랑을 해서인가.
사탄이라 할 만큼 싫었던 그 애가 나의 남자친구가 된 것은 나도 의문이었다. 가벼운 메시지를 주고받던 어느 날 그 애는 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순간 일렁이는 감정을 숨기며 딱히 없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그 애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손가락 마디가 굵어지고 키가 한참 커진 그 애가 장난을 치면 예전같이 싫지 않았다. 그 애의 둥그런 눈이 접히고 통통한 입술이 유연하게 귓가까지 말아올라가 웃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조금 떨리기도 했다. 여전히 개구쟁이 같은 눈을 하고 있지만 그 애가 나를 대하는 행동은 미세하게 부드러워졌다. 그 변화가 나를 향한 마음이라 생각했다.
며칠을 고민하다 그 애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도착한 메시지는 빵빵하게 부풀은 나의 마음을 바늘로 톡 터뜨려 버렸다. 그 애는 우리 반의 Y라는 여자아이를 좋아한다고 했다. Y는 P와 M의 친구이기도 했고 나의 친구이기도 했다. 목소리가 벨벳같이 부드럽고 몸체는 작고 아담한, 생글생글하게 잘 웃는 밝은 친구였다. Y를 떠올리니 내가 남자라도 그녀를 흠모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김살 없이 요정 같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괜히 그 애에게 그녀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원치도 않은 연애 상담을 도맡아 주절거리니 그 애는 나의 그 모습이 웃겼는지 자신이 얼마나 Y를 좋아하는지, 그 웃는 모습은 얼마나 화사한지 같은 말을 대본을 읽는 양 떠들어댔다. 그 장난에 마음이 상해 더 이상 그 애에게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학교에서 그 애를 만나면 데면데면하기 이를 데 없어진 나는 그 애가 말을 걸던 장난을 치던 반응하지 않았다. 피부색부터 이목구비, 얼굴에 패는 주름마저 다른 이방인인 나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고, 문화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른 외국인을 봐주기나 하겠냐며 마음을 추슬렀지만 그럴수록 비참해지는 내가 싫었다. 학교에서 Y를 보면 도드라지게 어색해지는 나를 그 애는 봤을 터다. 메시지에 더 이상 답하지 않는 나에게 그 애는 뜬금없이 이번 주 토요일에 같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이게 나에게 온 문자가 맞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읽었다. 극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애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남자와 단둘이서 영화를 본 적이 없는 나는 떨리고 긴장된 상태로 그 애에게 다가갔다. 학교 이외에 곳에서 만나본 적이 없어 사복 차림이 낯설었다. 그 애는 종아리까지 오는 헐렁한 카고 바지에 이상한 용 그림이 그려진 반팔 티를 입고 있었다. 학교에서와는 다르게 멋쩍어 보이는 그가 낯간지러웠다. 그 미묘한 공기를 견딜 수 없어 가장 빠르게 볼 수 있는 영화를 골라 상영관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가라앉은 듯한 영화관은 먼지 냄새와 팝콘 냄새, 텁텁한 방향제 냄새가 났다. 우리는 손을 더듬어 자리를 찾고 눈을 몇 번 깜빡여 시야가 어둠에 적응하도록 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광고가 나올 때 그 애는 내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말했다. 그 말을 정확히 듣지 못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니 그 애는 속닥였다. 나랑 사귈래?
영화는 두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뻔한 가족영화였다. 여러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내 두 눈에 반사판이라도 댄 듯이 화면은 하얘졌고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두 시간이 안 되는 상영시간 동안 나는 그 애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 애도 긴장한 듯 스크린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말'을 들은 뒤 나는 그 애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을 배웅해 주던 그는 메시지 하라는 말만 남겼을 뿐이다. 집에 가는 길에 P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그 애가 사귀자고 했어.
- OMG! 그래서 좋다고 했어?!
- 아니 아직
- 니 마음은 어떤데?
- ... 모르겠어
- 니 마음이 제일 중요하지. 근데 사귀게 되면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줘야 해!!!
집으로 돌아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철푸덕 앉아 선풍기를 틀어 놓고 흐르는 땀을 말렸다. 남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수백 번은 생각해왔던 나인데 막상 고백을 받으니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상상했던 남자친구의 모습은 듬직하고 여유로운, 모두에게 선망받는 사람이었는데 그 애는 내가 생각한 모든 조건들에 빗나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 M에게 메시지가 왔다.
- 너 오늘 고백받았다면서?
- 응, 어떻게 알았어?
- 걔가 나한테 말했어. 걔, 널 굉장히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사실 내가 말은 못 했지만 네가 입학한 날 첫눈에 반했었다고 나한테 말했었거든. 너에 대한 마음은 다 진심일 거야.
나에게 첫눈에 반했다니... 그럼 여태까지 나를 짝사랑해 왔다는 거야?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군가가 나에게 호감을 표현한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근거렸다. 모든 일이 한순간에 일어났다. 순서가 뒤죽박죽했다. 그 애가 날 좋아한 게 먼저인지, 내가 그 애를 좋아한 게 먼저인지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사랑의 작대기가 움직였다. 그 순간 메시지가 왔다, 'Hey'. 그 애가 보낸 그 세 알파벳이 나의 마음을 잠재웠다. 그래, 누가 먼저 좋아한 게 무슨 소용이야. 서로 같은 마음인 게 중요하지. 나는 그날 그에게 'Yes'라는 답을 보냈다.
다음 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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