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Bastard, baby
epi. 4
저 멀리 P와 M이 교복을 입고 흙먼지가 이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둘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숨이 넘어가도록 깔깔거리며 앞치락 뒤치락 걷고 있다. 수업이 마치면 우리 셋이 함께 뛰어가던 그 길에 그들이 있다. 얼른 가서 알은체해야지. 그들을 놀래켜주고 싶어 깨금발을 하고 슬금슬금 뒤로 다가가 왁- 하고 그들의 어깨에 매달렸다. 반달로 말려있던 그들의 눈꼬리가 내 얼굴을 보고는 일순간 일그러졌다. 크게 벌리고 웃던 입도, 이완되어 있던 눈썹 근육도 딱딱한 모양으로 굳어졌다. 구겨지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 나는 자세를 고쳤다. 처음 보는 그들의 반응에 어리둥절했다.
P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 난 너 같은 간신배한테 할 말 없어.
이어 M이 거칠게 말을 덧붙인다.
- 넌 우리 친구도 아니야. 꺼져버려, 이 배신자야.
이들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뒤통수를 세게 가격 당한 느낌이었다. 그들은 가늘고 길게 뜬 눈을 굴려 나를 흘긋 쳐다보았다. 싸늘한 P의 눈을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한 채 나는 시선을 그들의 교복 구두 앞 코로 옮겼다. 그들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얼음같이 차가운 광선이 나와 나의 살을 베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그 냉랭함에 사지가 굳어 버렸다. 떨어지지 않는 입을 뗐다.
-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왜 그래...
그들은 눈을 떨군 채 횡설수설하는 나를 쏘아 보다 매섭게 뒤를 돌아 길을 떠났다. 그들의 모습이 작은 원에서 작은 점이 되고, 더 작게 더 작게, 불어오는 먼지처럼 작아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깨에 메고 있던 책가방을 떨어지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텅이가 다 날아갈 때까지 엉엉 울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들을 따라가 그게 아니라고, 나는 그저 사랑에 빠졌을 뿐이라고 매달리고 싶었지만 엉망이 되어버린 이 관계에 나는 주저앉아 버리지도, 그 자리를 떠나지도 못한 채 울고만 있다. 속절없이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뺨을 지나 교복 셔츠에 떨어졌다. 속눈썹은 가닥가닥 뭉텅이가 되어 눈물을 머금고 어느새 부어오른 눈두덩이가 무겁게 시야를 가렸다. 내 사랑은 사치였다. 그들이 만들어준 소중한 영역을 잃고 싶지 않다.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 이방인에게 사랑은 어울리지 않는다.
...
축축한 눈가를 닦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진정되지 않는 숨을 불규칙적이게 내쉬었다. 눈은 풀이라도 붙여 놓은 양 뜨기가 힘들었다. 누운 등을 따라 패인 얇은 스펀지 침대가 원래의 모양을 되찾고 있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 터 앉았자 내 움직임에 따라 싸구려 철제 침대 프레임에서 끼익- 끼익- 소리가 났다. 꿈이었다. 아니, 악몽이었다. 왜 이런 꿈을 꾼 거지. 얼마나 운 것인지 베갯잇에 진한 눈물자국이 나 있었다.
차라리 모든 게 꿈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먹구름이 온 하늘을 덮은 날이었다. 큰 태풍이 온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그게 오늘인가 보다 하며 나는 다려진 교복을 입고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지만 구름에 해가 다 가려져 주변이 깜깜했다. 반짝- 하고 한순간 주변이 밝아졌다 다시 어두워지고 뒤이어 큰 소리의 천둥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수저를 떨어뜨렸다. 굵은 빗방울이 지붕 철판을 툭툭 때리는 것 같더니 곧 뚫을 기세로 억센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런 스콜이 내리면 옆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쏴아- 하고 쏟아부었다가 쥐 죽은 듯 조용해지고 또 한 번 쏴아아- 하고 쏟아지더니 어느새 잠잠해지는 날씨가 매번 새삼스럽다. 이렇게 큰 태풍이 오면 휴교령이 내려진다. 몇 분간 쏟아진 비만으로도 홍수가 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휴교령이 내려지지 않아도 우리 학교는 이 나라에 몇 없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라 학부모들의 성화로 자체 휴교가 될 것이다. 오늘은 학교에 갈 수 있으려나, 하던 찰나에 띠링- 하고 메시지 알람이 떴다. 그 애의 메시지다.
- 이게 무슨 말이야?
평소와 다르게 짧고 간결한 그 애의 메시지를 뚫어지게 보았다. 띠링. 이어 사진이 전송되었다. P와 M과 내가 속해 있는 친구들 무리의 비밀 그룹 채팅창의 캡처 화면이었다. 한 아이가 이렇게 써놓았다.
'걔네 가족 깡촌에서 온 거라며. 솔직히 우리 학교 온 것만 해도 천운인 건데 한국인 여자친구까지 생겼으니 팔자 폈지. ㅋㅋㅋ'
이어 그 밑에는 P와 M, 그리고 나의 동조 섞인 'ㅋㅋㅋㅋ'가 붙어 있었고 몇 개의 좋아요 표시까지 걸려 있었다. 이게 뭐지. 나는 이런 채팅을 본 기억이 없다. 그리고 내가 덧붙인 저 웃음은 어디서 생긴 거지. 그 애에게 나는 정말 모르겠다고, 저런 글이 있는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내가 저 말에 동조했을 리 없다. 하지만 그 애는 정말 불같이 화를 냈다. 활활 타오른다는 말이 그때의 그 애를 표현하는 말인 것 같다.
그 애는 이 도시에서 차로 대여섯 시간 떨어진 시골에서 왔다고 했다. 빈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이 나라는 아주 잘 살지 않으면 아주 못 살았다. 그 애의 출신에 대해서는 몇 달 전 그 애와 공터에 앉아 이야기하며 알게 되었다. 그 애의 아버지는 건축업에 종사하고 어머니는 근처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했다. 그 애를 포함해 총 5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애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무렵 그들은 이 도시로 이사를 왔다. 이 나라에서는 그 애 부모 어느 쪽의 직업도 돈을 잘 벌지 못한다. 하지만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바램으로 그 애를 우리 학교에 입학시키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없다고 했다. 그 애는 자신 밑에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배워 성공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하는 그 애의 눈빛이 너무나 결연해 나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 이야기를 듣고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었다. 어쩌면 그 애가 가장 터부시하는 모습을 나에게 꺼내놓기까지 얼 만큼의 연습이 필요했을지 가늠이 안 갔다. 무언가 말하기보다 그 애를 꼭 안아주고 싶어 팔을 벌려 그 애를 껴안았다. 그 일이 불과 며칠 전이다.
그 일이 있은 후 그 애는 나의 SNS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 애가 바라는 대로 나는 그 무리가 포함되어 있는 모든 SNS 채팅과 비밀 그룹 페이지를 나왔고 그 무리와 그 애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생겼다. P와 M과 나와의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그 비밀 채팅방이 새어 나가게 된 경로로 나를 의심했고 그 애 또한 그 애의 가정사를 탄로 한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애는 그 일 이후에도 성실히 나를 사랑해 주었다. 표면적으로는 나와 그 애 사이에 변한 건 없어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공기가 내게 조금씩 버거워졌다. 그 꿈이 나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사랑을 탓하던 순진한 꿈속 내가 나았다. 모든 게 얽혀 버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시작도, 끝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애와 나, 나와 P와 M 사이 엉켜버린 채 풀리지 못한 갈등은 그저 방치된 상태로 존재했다.
마지막 화가 이어집니다.
* < Bastard, baby >는 총 5화로 끝이 날 예정입니다.
첫 소설이라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 마지막 화와 함께 QnA도 첨부하려 합니다.
이야기를 읽으며 궁금했던 점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어떤 질문이던지 환영입니다. :)
의선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