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Bastard, baby
Last episode.
그때 꾸었던 그 악몽처럼 나는 주저앉지도, 그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매일 밤 사랑과 우정을 저울질했다. 그 애는 나에게 우정 위의 사랑을 요구했다. 그런 친구들이라면 없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영원을 그리던 나의 사랑은 점점 꺼져갔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자기를 사랑해 주기 바라는 그가 억척스럽게 느껴졌다. 그 일 이후 우리는 졸업을 했다.
하루는 그 애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쇼핑몰 맨 꼭대기 층 영화관 매표소 앞에는 지하까지 내려다볼 수 있는 커다란 난간이 둥글게 나 있었다. 그 애와 그 난간에 기대어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아래층을 보니 P와 M과 다른 친구들이 웃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애에게 말했다.
- 저기 저 아래 봐! 저기 애들이 있어!
나는 검지로 그들을 가리키며 그 애에게 기쁜 듯 알려 주었다. 함께 내려가서 인사하자고 말하려는 그 순간, 그 애가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보며 단어를 내뱉었다.
- 개새끼들.
서늘해지는 낯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그 애의 눈에서 살기를 느꼈다.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려 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 붙잡고 있던 얇은 끈이 툭- 끊어져 버렸다. 화가 났다. 어디까지 그 애에게 맞춰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얼마큼의 친구들을 끊어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스며나오는 그 애의 원망 어린 눈은 매일 나를 지치게 만들었고 사랑이란 거대한 장막에 가려진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날 이후 그 애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지고 눈빛이 부담스러워졌다. 나를 기다리는 그 애가 보이면 길을 빙 둘러 다녔고 답하지 않은 그 애의 메시지가 쌓여갔다. 나는 서서히 이별을 준비했지만 그 애는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매일 밤 내 휴대전화는 그 애의 전화로 쉴 새 없이 울려댔다. 벨소리에 어지러워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꿔 뒤집어 놓았다. 그 애는 메시지로, SNS로, 문자로 어떻게 이렇게 차갑게 돌아서 버리냐 하다가도 돌연 내 잘못이라고, 내가 다 잘못했다며 이유 없는 맹목적인 사과를 했다. 아침마다 인사를 담은 그 애의 메시지가 도착해있었고 그 애를 만나지 않아도 그 애의 일과를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메시지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 애는 이별을 부정했다. 며칠 후 이별에 분노했고 그 뒤엔 내 결정을 수용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그 애의 잘못은 없었다. 모든 첫사랑이 그러하듯 애틋했던 마음이 도려내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는 그 애를 사랑할 수 없었을 뿐이다. 무엇이 내 마음을 이리도 닫아놓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엉망이 되어버린 우정 때문인지, 우리의 사랑을 싫어한 누군가의 장난 때문인지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애의 사랑이 더 이상 달지 않고 그저 목에 메어진 목줄처럼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 애가 싫어졌고 지겨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한국행이 결정되었다. 차라리 마음 한편이 후련했다. 이곳에서 지냈던 모든 시간들을 아름다운 추억인 양 포장할 기회가 생긴 거니까. 내가 현실도피하듯 한국을 떠났던 것처럼 이곳도 그렇게 떠나버리면 된다. 그러면 모두 행복했던 시간들로 미화될 것이다. 한번 마음을 먹으니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그동안의 짐들을 정리하고 친구들에게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소식을 알렸다. 대학 입학 준비로 정신이 없던 그들은 매우 아쉬워했다. 그 일 이후로 서먹했던 P와 M에게도 말을 전했다. 그들은 곧바로 근처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 또한 그들을 만나 정리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기에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원두 냄새가 몰려왔다. 빙 둘러 사위를 보니 구석진 자리에 그들이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들이 반가웠다. 그들을 보며 손을 흔들어 내보이고 P의 옆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M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 좀 전까지 운 사람처럼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고 코 끝이 발개져 있었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 다 내 잘못이야..
M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내 손을 잡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P의 기색을 살폈다.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P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만 껌뻑껌뻑 뜨고 있는 나에게 M이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내가 다 망쳐 버렸어.. 내가 그 애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어. 너에게 이 말을 하려고 속으로 몇 번이고 준비했었는데 이렇게 금방 네가 떠나버릴 줄 몰랐어.. 내가 정말 미안해..
M의 이야기는 이랬다. M은 그 애가 어디에서 왔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다. 실은 M도 그 애와 비슷하게 이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와 입학을 했다고 했다. 학생의 출신지는 학교에서 까다롭게 확인하는 항목 중 하나라 타지역 학생들은 입학 전 주소지를 옮겨 출신지가 발각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이런 학생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비밀에 부친다면 얼마든지 비밀이 될 수 있다. 그러다 출신지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질 나쁘기로 소문난 어느 호텔가의 한 아이가 M에게 출신지에 대해 집요하게 묻기 시작했고 M은 그 애의 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고 한다. M의 먹먹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애먼 테이블만 손톱으로 긁고 있었다. P가 무겁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거야?
- 응.
나는 입꼬리를 부자연스럽게 올리며 웃어 보였다.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어 마음이 물먹은 듯 착 가라앉았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M의 말로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 일이 벌어진 후 내가 비밀 그룹 채팅창을 나가고서도 P와 M은 방과 후 한동안 나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 애의 눈을 피해 나를 불러보려고도 했지만 나는 늘 그 애의 뒤꽁무니만 쫓기 바빠 그들을 보지 못했다. 그런 내 모습이 학교에 처음 입학했던 때와 비슷해 보였다고 P는 말했다. 불안하고 외로워 보였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유리잔에 서린 물방울들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송골송골 맺혀있던 물방울들은 손가락이 지나가자 미끄러지듯 길을 내며 아래로 주륵 하고 떨어졌다. 카페를 나서기 전 그들과 진한 포옹을 나눴다. 그래도 너희가 없었다면 나는 견디지 못했을 거야. 사랑 한번 유별나게 한 나를 용서해줘서 고마워.
띠링-
한국에 돌아가기 며칠 전, 그 애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꽤 오랫동안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던 그 애였기에 의아해하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평소와 다르게 길게 이어진 메시지를 읽어 내려갔다. 곧이어 눈에 눈물이 꽉 차올라 시야가 가리어졌다. 더운 공기가 훅 불어온 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가까스로 매달려있는 눈물을 거스르려 천장을 올려다보니 관자놀이 옆으로 눈물이 주륵 흘렀다. 그 애는 이제 나와 이별했다.
'사랑에게,
교실에 들어서기 전 복도 끝에서 연신 후후하고 심호흡을 하는 네 모습을 보며 생각했어. 쟨 왜 저렇게 긴장했을까 하고 말이야. 피부가 하얗고 뺨이 발그레한 게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뾰족한 눈을 하고는 매일 주변을 경계하는 네가 어쩐지 안쓰러워 보였어. 늘 창가 구석진 자리에 앉아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있었잖아.
웃는 모습은 어떨까 혼자 상상하는 내가 웃기더라고. 그래서 한번은 너의 뒷자리에 앉았어. 할 수만 있다면 옆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건 부끄러워서 말이야. 딱딱하게 앉아있는 너에게 장난을 걸었어. 이름을 부르고 모른척하는 가벼운 장난이었지만 내 장난에 너는 슬며시 미소 짓더라. 그 이후엔 점점 짓궂어질 수밖에 없었어. 장난 뒤에 새어 나오는 너의 웃음이 예뻤거든. 그때 너는 날 bastard라고 불렀어. 기억이 날까 모르겠다.
나의 첫사랑이 되어줘서 고마워. 너의 뾰족했던 눈이 둥그러지고 대나무처럼 곧게 선 목이 내 어깨에 힘없이 축 늘어져 기대었던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 Bastard! 하고 나를 크게 부르고는 다시 baby라고 덧붙이며 햇살처럼 웃어주던 네가 요즘 매일 꿈에 나와.
언제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이렇게 인사해 줘.
Bastard, baby.
사랑을 담아,
Anthony.'
...
호텔을 빠져나와 더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연회장 안 에어컨 냉기에 숨이 차가워져 자꾸 재채기가 나왔다. 호텔 앞에는 큰 도로변이 있고 그 건너에는 P와 M과 자주 걷던 강가 산책길이 있다. 이브닝 가운이 아니라 다행이다 생각하며 나는 걷기 시작했다. 호텔 근처를 벗어나니 보도블록이 끝나고 아무렇게나 포장된 길이 이어졌다. 한국에서 이곳으로 오며 줄곧 생각했다. 그 애를 만나면 꼭 인사를 건네야지. 그때 못했던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꺼내야지, 하고 말이다. 하지만 비겁한 나는 그 애를 찾기는커녕 호텔을 뛰쳐나와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발이 불편해 발치를 보니 안 신던 구두에 발뒤꿈치 살이 벗겨져 분홍색의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근처 화단에 걸터앉아 구두를 벗고 발을 주물렀다. 그러게 왜 이곳에 다시 와서 사서 고생을 하느냔 말이다. 그때 나를 비추던 노란 가로등 불빛이 무언가에 의해 가려졌다.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이 굵고 어깨가 넓은 것을 보니 남자인 것 같은데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두려운 마음에 맨발로 일어나 의문의 남성을 확인했다.
- Hey.
그 애다. 헤어진 후 한국에 돌아가 매일 밤 꿈에서 만나던 그 애가 눈앞에 서 있다. 나는 뒷걸음질 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런 나를 쳐다보며 그 애는 그 시절처럼 웃고 있었다. 조금 거칠어진 얼굴이었지만 둥그런 눈매에 처진 눈꼬리, 웃을 때 두툼한 입술이 옆으로 길게 휘어지는 것은 여전했다.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고 내가 걸터앉아있던 화단에 풀썩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고는 바지 주머니 부분을 손으로 더듬어 무언가를 찾았다. 그곳에 있어야 할 물건이 없는 듯 두리번거리더니 들고 있던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여 작은 종이 갑을 꺼내었다. 담배인 줄 알았던 그것은 껌이었다. 그 애는 넉살 좋게 나에게 그 껌을 건네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껌을 받아들고 그 애에게 한 뼘 떨어져 앉았다. 딱딱하고 마른 껌을 입에 넣으니 아래턱에 약한 자극이 느껴지며 침이 나왔다. 껌을 침과 함께 녹이니 부드럽고 달큰한 상태가 되었다. 서로 말없이 껌만 잘근잘근 씹고 있는 와중에 그 애가 먼저 말을 꺼냈다.
- 많이 보고 싶었는데 막상 이렇게 만나니 껌밖에 씹을 수가 없네.
그 애는 말을 꺼내곤 멋쩍은 듯 콧등을 긁었다. 고개를 살짝 비틀어 그 애를 곁눈으로 보았다. 이미 어둑해진 주변은 흑암 같았다. 노란 가로등 불빛 하나에 그 애와 함께 앉아있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자 내 몸은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아팠다. 열이 펄펄 끓고 정신이 혼란할 만큼 열병에 시달렸다. 살갗이 이불에만 스쳐도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고 먹은 것은 곧바로 게워냈다. 낮인지 밤인지 구분도 안되는 그날에 그 애는 매일 내 꿈속에 있었다. 진절머리 나도록 매일. 어떤 날은 꿈에서 그 애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던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깨자 텅 빈 방에 뚝 떨어진 것 같아 아린 마음을 쥐고 펑펑 울었다. 그렇게 1년 동안 그 애의 꿈을 꾸었다. 괜찮아지다가도 저리도록 이별이 아팠다. 그 애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던 때 나는 이별을 한 게 아니었다. 한국에 돌아오고 그 애의 존재가 사라지자 이별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그 애도 이만큼 아팠겠지, 이만큼 그리웠겠지.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 이별하는 법도 몰랐던 내가 부끄러웠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쌩쌩 오가는 차들만 바라보았다. 밤이 되니 더운 공기가 슬며시 자취를 감추고 서늘함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단물이 다 빠져 딱딱해진 껌을 입안에서 굴리며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연신 다리만 흔들었다. 크게 숨을 들이신 뒤 말을 꺼내었다.
- Bastard, baby.
< Bastard, baby >
- The End -
* 그동안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화가 예상보다 길어져 말씀드렸던 QnA 부분은
다음 메일로 가져오려 합니다.
글을 읽으시며 궁금하셨던 부분이나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편하게 답신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저의 첫 소설을 읽어주시는 첫 독자라서 행복했습니다.
그럼 더 많은 이야기는 다음 메일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
여러분들의 소감을 들려주세요!
의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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