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사과를 건네는 옥수수
피부에 닿는 바람이 차다. 멀뚱히 창문 밖을 내다보다 반팔 티셔츠를 입기엔 조금 추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심하여 골라 든 옷은 또 반팔 티셔츠다. 연회색 면에 '다크 나이트 울프'라고 쓰인 어쩐지 비범한 티셔츠다. 하의는 여름 동안 꺼내지 않았던 도톰한 진청바지를 골라 입었다. 잊고 있던 두터운 청바지의 느낌이 나쁘지 않다. 차가운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창가에 오트가 누워 있다. 손으로 곱게 털을 쓸어내렸더니 찬기가 묻어났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야 해. 호미와 오트의 이마 즈음에 얼굴을 비볐다. 그리고 곤히 잠에 빠져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다섯 손가락을 쫙 뻗어 손뼉 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둥글고 카랑하게 말아 소리쳤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짝! 짝! 짝!) 결전의 날이 밝았다! (짝! 짝! 짝!)"
나의 우렁차고 힘찬 목소리에 그의 입꼬리가 쌜룩 올라가더니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온몸을 늘여 시원한 기지개를 편다. 긴장이 몸 구석구석에 붙을 하루가 될 텐데 헛웃음으로 일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에게 웃음 청심환을 건네주고 나는 출근 준비를 서두른다.
어제 먹다 남은 옥수수를 밥통에 넣어 두었다. 비닐 채로 넣어 둔 옥수수가 어찌나 뜨거운지 밥통에서 옥수수 봉지를 꺼내 싱크대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손가락을 귓불에 가져다 대며 다른 손으로 옥수수 봉지 비닐에 붙어있는 밥풀들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밥풀은 비닐에 붙어 곤죽이 되어 손가락 끝에서 으스러진다. 어느새 내 옆에 선 그는 말했다.
"옥수수 쉬지 않았는지 잘 보고 먹어야 해."
"옥수수도 쉬나?" 밥풀 묻은 손가락을 물에 헹구며 대꾸했다.
"그럼."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잠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그와 포옹하며 오늘 하루 잘 보내라고 말했다. 하루 끝에 모든 걸 말해달라고 덧붙였다. 주먹을 쥐고 양 팔을 그의 얼굴 앞에서 흔들며 "파이팅! 파이팅!"이라 말했지만 이 주문 같은 응원이 정말로 도움이 될 리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는 제 몫을 하고 올 테고 누가 뭐래도 오늘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 한 후에는 조금의 아쉬움도 남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건 그에게 하는 주문이 아닌 나 자신에게 하는 주문이다. 그의 옆에서 인고의 시간들을 지켜봐왔다. 밤낮없이 쓰고 외우고 자신의 실수에 질책하고, 그러다 체념하는 시간들. 그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아름다운 무늬가 만들어졌다. 현실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시간의 이질감에 긴장과 이완을 반복할 그의 하루가 고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밖에 나오니 하루 만에 추위가 공기에 녹아들었다. 아직도 여름의 끝을 잡고 놔주지 못하던 나는 이제 여름이 영영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쌀쌀한 날씨에 민둥하게 나와 있는 팔뚝을 괜스레 쓸어본다. 스크린 도어에 비친 내 옷차림을 훑어보니 조금 계절에 맞지 않은 듯하다. 승강장에 하나 둘 사람들이 몰려들고 열차에 올라탔다. 오늘따라 꽉꽉 들어찬 사람들에 조그만 한숨이 새어 나온다. 남들과 바짝 엉겨 붙어 휴대폰을 꺼낼 수도 없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젊은 남자의 뒤통수 밖에 보이지 않았다. '천 마스크를 끼다니 환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가? 귀에 거는 고무줄에 글씨가 써져 있네. 나름 패셔니스타인가?' 따위의 생각들을 했다. 이렇게 몇 정거장만 가면, 앞뒤 출입문이 번갈아 열리고 나면, 이 덩어리진 사람들 무리와 함께 열차를 빠져나오면, 옥수수가 쉬었는지 안 쉬었는지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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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찐 옥수수가 정말 먹고 싶었다. 이에 달라붙을 정도로 쫀득한 찰옥수수면 참 좋겠다 하며 그와 이야기를 했다. 대형마트에서 파는 옥수수는 너무 비싸고 거리 노상에서 파는 옥수수는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옥수수 알을 이로 베어 물고 옥수수 대의 수분을 쭙쭙 빨아들이고 싶었다. 톡톡 터지는 식감도, 고소하고 달콤한 맛도 간절했다. 이제 가을이라 옥수수 철이 끝나가는데... 찐 옥수수가 내 앞에 나타날까? 그 말을 하고 수일이 지난 어젯밤, 아주 달고 쫄깃한 찰옥수수를 먹었다.
어제는 연이어 진행해오고 있는 실험의 1차 분석일이었다. 이날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평소보다 몇 배 더 긴장을 하고 이에 대해 빠짐없이 준비하려 한다. 수십 마리의 동물을 희생하고 그들의 장기가 조직이 되고 그 조직이 다시 세포가 되는 과정에서 실수가 나면 그들의 목숨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동물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평소의 업무보다 숨을 떼고 생명을 끊어내는 일은 몇 배의 수고가 든다. 어제가 꼭 그런 날이었다. 이미 지하철에서 파리해진 몸뚱어리를 매고 오늘 생을 달리할 그들의 상태를 확인한다. 몇 분 후 나는 그들의 숨을 앗아가버린다. 무엇의 감정을 느낄 겨를도 없이 아직은 따뜻한 그들의 가슴에 날카로운 바늘을 찔러 주사기 가득 피를 뽑고 가죽을 열어 필요한 장기를 적출한다. 오늘은 림프절, 뇌, 척수다. 배가 너덜너덜해진 동물의 옆구리에서 림프절을 뜯어내고 심장에 조그만 칼집을 내어 뇌와 척수에 모든 피가 제거되도록 한다. 머리를 잘라 두개골을 깨내어 작은 뇌를 꺼내고 꺼낸 뇌를 조각내고 등뼈를 도려내 척추에서 척수를 분리한다. 이 과정을 끝내면 점심시간이 되고 끔찍한 일들을 해낸 나는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배가 고프다. '점심은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먹고 와야지. 저녁에는 족발이나 삼겹살 같은 고기를 먹는 게 좋겠어.' 피 묻은 손을 씻고 여물 같은 샌드위치를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한다. 여러 화학약품들과 기계들에 둘러싸여 오후를 보내는 것까지 하면 꼬박 예닐곱 시간이 걸린다. 오늘 희생당한 그들처럼 일을 다 끝낸 나도 너덜너덜해진다.
힘든 날이었지만 퇴근시간에 맞춰 일이 끝났고, 더 행복한 사실은, 그가 회사 근처로 나를 마중 나왔다는 것이었다. 무거웠던 육신이 단숨에 가벼워졌고 마음도 구름처럼 가벼워졌다. 회사 옆 카페에서 결전의 내일을 준비하던 그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내가 다가온 것도 모르고 그는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앞에 다가가 앉았다. "우리 오늘 고기 먹자!" 나의 위는 단백질을 찾았고 그중에서도 돼지고기를 원했다. 내가 이렇게 일찍 올 것을 예상 못 했던 그는 처음엔 놀랐고 이내 기뻐했다. 바람결이 선선하고 시원해 우리는 지하철이 아닌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로 돌아갔다. 냇가를 가로지르니 여러 가지 계절의 냄새가 났다. 축축한 풀 냄새, 고인 물의 텁텁한 냄새, 바삭한 오후의 햇볕 냄새, 저녁을 준비하는 밤의 냄새. 자전거 페달을 밟는 허벅지가 뜨거워질 때 즈음 우리는 도착했다. 자주 가는 정육 식당은 이미 만석에,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 개운한 날을 그냥 넘길 수 없으니 우리도 조금 기다리자 말했다. 우리는 식당에서 내놓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고기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순번을 기다렸다. 그는 기다리는 내내 자료를 찾고 준비한 말들을 외웠다. 얼마나 간절한지 하늘에도 닿을 마음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가방을 뒤적이는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우리의 순번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이었다. 그는 말했다.
"내가 저번에 받은 그 봉투 어디 있지? 분명히 내가 잘 넣어둔 것 같은데 안 보이네. 집에 있나?"
가방을 뒤적이고 지갑을 뒤적이는 그를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그가 찾고 있는 봉투를 내가 버렸다는 것을. 분명 봉투를 버린 기억이 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생각했다. '이걸 이실직고해야 하나?' 한 번 더 마른침을 삼키고 그에게 말했다. "그 봉투... 내가 버렸는데?" 말하면서도 얼마나 아찔했는지 모른다. 그 봉투 속에는 빳빳한 오만 원 신권이 들어 있다. 찢어져 있는 봉투가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어 빈 봉투인 줄 알고 버렸던 것이다. 그의 표정은 순간 어두워졌다. 그 오만 원은 그가 이뤄낸 멋진 성과이자 기념품 같은 것이다. 그는 거듭 나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 버렸는지, 그 속에 돈도 버렸는지, 쓰레기장에 가도 찾을 수 없을지, 왜 물어보지 않고 남의 물건을 버리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밖에 얘기할 수 없었다. 우리 둘 사이의 공기가 납처럼 무겁게 내리 깔렸다. 오만 원이면 우리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식당에서 배불리 먹고도 남는 돈이다. 하지만 이미 쓰레기 소각장에 실려 갔을 그 봉투를 찾을 방도가 없다. 나는 또 한 번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물어라도 보지 그랬냐고 그가 덧붙였다. 거대한 호떡 누르개 같은 그 오만 원권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다. 개운한 날이 더없이 찝찝한 날이 된 순간이다. 말없이 한참을 앉아있다 그에게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그냥 빨리 먹을 수 있는 것을 먹자고 했다. 중요한 날을 앞둔 그에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기도 했다. 내 기분을 눈치챈 그는 나에게 어떤 것이 마음을 상하게 했냐고 물었다.
"만약 네가 내 오만 원을 실수로 버렸다 해도 나는 '어쩔 수 없지. 내가 잘 간수하지 못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 돈은 내 돈이 아니었나 봐.'하고 넘겼을 거야. 근데 너는 아닌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아. 그래도 너의 물건을 함부로 버린 내 잘못이야. 미안해."
그는 내 말을 듣고 자신의 태도에 대해 사과했다. 그가 사과할 일이 아닌데도 사과해 주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시작된 화는 이유도 없이 번져갔다. 그냥 그와 마주 보고 뭔가를 먹고 싶지도, 입에 뭔가를 넣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혼자 저녁을 먹고 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는 매정하고 차갑게 돌아서서 집에 왔다. 청소를 하고 집안을 치우고 샤워를 하는 와중에도 화가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화가 날 이유가 없는데도 사그라지지 않는 감정을 느끼며 아마도 나는 그냥 누군가한테 화를 내고 싶었던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그런 것이 되었다. 그래서 억지로 기분을 되돌리려 노력하지 않았다. 띠링. 그에게 메시지가 왔다. 미안하다는 말과 그가 기분이 안 좋았던 부분, 평소였으면 혼자 집으로 가게 두지 않았을 테지만 내일은 중요한 날이니 얼른 끼니를 해결하고 가겠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띠링. 뒤이어 배고팠을 텐데 입맛 없게 만들어 미안하다는 말과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알려 달라고, 뭐든 사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행동은 아주 어른스럽고 성숙했다. 하지만 기분이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앉아 있었다. 그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그가 돌아와 다시 사과해도 기분이 누그러지지 않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냥 그렇게 구겨진 기분으로 한동안 혼자 있고 싶었다. 날 것의 기분을 느낀 것이 오랜만이기도 하고 화에 사로잡힌 내가 어디까지 타들어 갈 것인지도 궁금했다.
아주 짧은 독백이 지나고 현관문이 열렸다. 그의 손에는 뭔가 들려 있었다. 찐 옥수수와 양파와 연어. 아무 말도 없는 나에게 그는 말했다.
"오늘 힘든 날이었잖아. 고기가 먹고 싶던 것도 힘들고 피곤해서였을 텐데 나 때문에 밥도 못 먹고 미안해. 구워진 고기를 사 오고 싶었는데 없어서 대신 좋아하는 연어 사 왔어. 먹고 싶지 않으면 내일 먹어. 옥수수는 지금이 따뜻한데 이것도 먹고 싶지 않으면 밥통에 넣어 놓고 내일 먹어도 돼. 내가 화낼 게 아니었는데... 물건 잘 두지 못한 건 내 잘못인데 괜히 화가 났나 봐. 미안해."
무거운 분위기를 장난으로 풀려 하지 않고 진지하게 사과하는 그의 정중함이 고마웠다. 나는 사실 그가 현관을 들어오는데 이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이 다 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화가 나서 그를 버리고 차갑게 내달렸는데 그는 자기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할 내가 걱정돼 이것저것 사 온 게 안쓰럽고 고마웠다. 그가 손을 씻는 동안 아직도 따끈한 옥수수 꾸러미에서 옥수수 한 개를 꺼내어 먹었다. 찰지고 달큰한 옥수수가 참 맛있었다. 옥수수를 먹는 나를 보고 그는 말했다. "옥수수 먹어서 다행이다. 전부터 옥수수 먹고 싶다 했는데 이제야 먹게 해주네." 나는 그 말에 더 열심히 옥수수를 먹었다. 짭조름하고 달달했다. 우리는 그렇게 화해했다. 싸운 적은 없지만, 내가 일방적으로 화를 낸 싸움이었지만, 그의 다정에 싸움은 힘없이 종료되었고 나의 감정도 무력하게 잠잠해들었다.
몇 시간이 흐르고 그에게 말했다. "나는 내가 너한테 오만 원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가 말한다. "나도 혼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더라. 네가 그렇게 생각하겠다 싶더라고. 당연히 아니지. 너는 나한테 오천억보다 더 큰 사람이야." 그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출근해서 다시 먹은 그 옥수수는 쉬지 않았다. 밥통에 넣어 두었던 옥수수는 여전히 아주 따뜻하고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