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순기 - epi. 1
물기를 머금은 돌솥 몇 개가 가스 불 위에 놓인다. 돌솥 안에는 현미와 찰보리, 조 등이 섞여 잘 씻긴 쌀이 소담히 담겨있다. 물 양은 딱 검지 마디 높이만큼 자작하게 부어준다. 순기는 기다란 라이터를 찾아 들고 돌솥 아래에 불을 붙인다. 가스레인지 노브가 오른쪽 끝까지 돌아가며 따따따따- 소리를 낸다. 불꽃이 하늘하늘한 꽃잎처럼 돌솥을 감싼다. 매일 보는 그 불꽃 잎이 순기는 지겹지가 않다. 이제 강한 불로 쌀을 푹 끓이기 시작한다. 순기는 기다란 라이터를 흔들며 지난주 문화센터에서 배운 민요를 소리 내어 불러본다.
"충신은 만조정이요~ 효자는 가가재라!"
가사를 아직도 못 외워 삐뚤빼뚤하게 종이에 적은 가사를 냉장고에 붙여 놓고 틈날 때마다 불러보곤 한다. 이번에 배우는 노래는 박자가 생명이라 손을 까딱까딱하며 정확히 불러야 멋스럽게 부를 수 있다고 했다. 문화센터에서는 선생님이 장구를 쳐주니 정확한 박자에 노래할 수 있는데 혼자가 되면 통 어렵다. 선생님이 민요는 한을 담는 거라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순기는 민요 노랫가락에 묻어나는 슬픔이 어디서 나오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 인생 가득한 한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노랫가락이라는 것도 말이다.
순기는 모든 음식에 능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건 단연 돌솥비빔밥이었다. 돌솥에서 쌀알이 물에 익기 시작하며 부드러워지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다. 전분이 가득 풀린 밥 물은 뽀얗고 끈적해 거품마저 탄성 있게 터진다. 돌솥이 막 끓기 시작하면 5분 뒤 약불로 바꿔준다. 순기는 시간 같은 건 재지 않는다. 이제 밥 냄새만으로도 얼마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약불로 최대한 은근하게 솥을 데워줘야 바닥에 누룽지가 알맞게 깔린다. 이 누룽지를 먹기 위해 순기의 식당에 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제 불을 끄고 얼마간 뜸을 들여준다. 그 사이 솥의 개수대로 계란 프라이를 튀긴다. 오랫동안 써서 닳고 찌그러진 프라이팬을 꺼내 콩기름을 넉넉히 부어주고 기름을 달군다. 들고 있던 쇠숟가락으로 달걀 중간을 톡 깨뜨려 프라이팬에 미끄러지듯 달걀을 떨어뜨려준다. 오늘은 달걀이 아주 신선하다. 달걀노른자가 탱탱하고 힘이 있는 걸 보니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 되지 않겠냐 하며 조금 웃는다. 계란 프라이에 소금 간을 약간해주고 겉 테두리가 바삭할 때까지 튀겨준다. 김이 뻘뻘 나고 윤기가 줄줄 흐르는 돌솥밥에 새벽에 미리 무쳐 둔 나물들을 가지런히 올린다. 무생채, 고사리, 채 썬 호박, 시금치가 둥글게 자리를 잡는다. 나물이 포위한 솥 중간에는 순기가 직접 담근 태양초 고추장 반 숟가락이 올려진다. 노른자가 약간 덜 익은 반숙 계란 프라이가 돌솥비빔밥의 메인을 장식한다. 곧이어 직접 방앗간에서 짠 참기름을 한 바퀴 샥- 둘러준다. 뜨거운 돌솥에 참기름이 달궈지며 고소한 향이 물씬 풍긴다. 오늘도 순기의 돌솥비빔밥은 이곳저곳을 방문할 택시 기사들에게 든든한 연료가 된다.
오라이 식당. 순기가 서울 골목에 낸 작은 기사식당 이름이다. 노란색 배경에 빨간색 글씨로 '오라이 식당'이 쓰여진 간판 아래 순기는 나물을 다듬고 있다. 나물류는 단가가 싼 대신 손이 많이 간다. 고사리는 억센 부분을 걷어내고 부드러운 어린 순만 남겨야 질기지 않다. 나물류 중에 손이 가장 많이 가는 것이 고구마 순이다. 채소 아저씨한테 부탁하면 커다란 잎이 붙어있는 고구마 줄기 부분을 값싼 가격에 몇 포대나 얻을 수 있지만 막상 손질해 보면 소쿠리 하나를 간신히 채운다. 손질은 또 어찌나 번거로운지 고구마 순 껍질을 벗기다 보면 양손 엄지, 검지에 거무죽죽하게 물이 드는데 이건 비누로 열심히 씻어도 여간해선 잘 지지 않는다. 그래도 고구마 순처럼 맛있고 값싸게 배불릴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순기는 생각한다. 손 빠른 순기가 드라마 한 편을 보며 한 포대의 고구마 순을 다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니 괜찮다. 새벽 일찍 식당 문을 열고 손님들을 받으면 한바탕 전쟁 같은 아침 시간이 끝난다. 오후 서너시면 손님이 잦아들기 때문에 순기는 앞치마를 푸르지도 못한 채로 식당 방바닥에 누워 티비를 본다. 머리를 받쳐 든 손이 저릿저릿 해질 때 즈음 옆에 있던 방석을 집어 베개를 삼는다. 오후의 햇볕이 식당 방바닥을 따끈하게 데운다. 가끔 동네 개들이 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트럭 만물상 아저씨는 오늘도 주문 같은 말들을 골목마다 쏟아낸다. 잠이 솔솔 몰려오는 나른한 오후다. 지난 주말에 빠글빠글하게 말아놓은 머리가 눌리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순기를 스르륵 잠에 빠져든다.
젊은 순기는 미군 부대에 있는 양복점에서 허드렛일과 심부름을 하며 돈을 벌었다. 객공이 될 정도의 기술은 없었지만 간단한 미싱은 할 수 있었다. 바삐 돌아가는 양복점에서 손이 빠르고 눈치가 잽싼 순기는 자기 자리를 단숨에 찾아 모두가 반기는 일꾼이 되었다. 밝고 싹싹한 순기는 다른 미싱사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가끔 가게를 방문하는 미군들과도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웃음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면 항상 순기가 있었다. 여름이면 시원한 보리차 한 잔을 들고 와 말도 안 통하는 미군들의 호의를 얻었다. 그들은 가끔 순기의 손에 팁을 쥐여주거나 미제 과자를 생색내며 건네기도 했다. 순기는 그런 것들을 받기 위해 행동한 건 아니지만 덤으로 주어지는 것들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기뻤다. 변변한 기술이 없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뛰어 다녀야 하는 심부름꾼인 자신이 사람들의, 심지어 파란 눈의 코쟁이들에게 통했다는게 내심 뿌듯했다. 혹시나 자신의 오지랖으로 동료들의 미움을 사진 않을까 하는 작은 마음이 들 때면 순기는 집에서 생강과 계피, 대추를 넣고 밤새 끓여 만든 수정과를 싸 들고 출근했다. 달고 쌉싸름한 수정과 맛이 꼭 순기의 마음 같았다. 그런 바지런함과 싹싹함이 순기의 무기이자 특기였다. 아주 가끔은 함께 일하는 미싱사들과 근처 미군부대에 떨어진 탄피를 줍기도 했다. 황금색의 매끄러운 탄피는 꼭 금덩이 같아 공터를 찾아 헤매도 즐거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탄피를 팔면 잡혀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덜컥 겁이 난 순기는 바로 그 일을 그만두었다. 보기와 달리 속이 작은 순기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일에는 항상 주의를 기울였다. 순기는 지금만큼의 행복이면 되었다. 더 큰 것은 바라지 않았다.
순기가 집으로 돌아오니 막내딸 선옥이 달려 나온다. 선옥은 빼빼 마른 몸을 하고 뜀박질도 요상하게 한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이 달리는데 그게 항상 순기를 긴장하게 만든다.
"아이고, 뛰지 마러. 무릎 깨지겄어. 밥 먹었어, 우리 강아지?" 순기가 달려오는 선옥에게 두 팔을 내밀며 물었다.
"아니, 아직 안 먹었어. 큰언니가 엄마 오면 같이 먹자고 했어!" 선옥은 잰걸음을 하며 순기의 옷소매 자락을 잡는다.
"그려? 얼렁 들어가서 밥 먹자. 배고프겄다, 우리 똥강아지들."
순기에게는 딸 셋과 아들이 하나 있다. 큰 딸 미자, 둘째 딸 연자, 장손 동범이, 막내딸 선옥이. 미자는 어느덧 자라 순기가 집을 비우면 아래 동생들을 잘 보살펴 준다.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음식을 곧잘 하는 미자는 어느새 순기의 음식 맛을 얼추 낸다. 집안일도 군말 없이 해내는 큰 딸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다. 숫기도 없고 부끄러움도 많은 미자가 사랑 담뿍 차게 받으며 좋은 집에 시집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요즘 불쑥 들곤 한다. 집에 돌아오니 따뜻한 온기가 순기의 시큰한 무릎께를 데운다. 밥 짓는 냄새가 구수하다.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참에서 솔솔 풍겨오던 생선구이 냄새가 순기네 집에서 나는 냄새라는 걸 대문을 들어서고 나서야 알았다. 아침에 미자에게 저녁 찬으로 고등어를 굽자며 말한 것을 깜빡했다. 잊지도 않고 때맞춰 잘 구웠네 하는 와중에 영주가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마당에서 나뭇잎을 돌로 짓이기며 소꿉장난을 하던 선옥이 또 송아지 마냥 비틀비틀 뛰어 영주에게 폴싹 안긴다. 영주는 그런 선옥을 들어 품에 안아낸다.
"아빠아-!"
"어이구- 우리 공주, 잘 놀았어?
"아빠, 나 오늘 학교에서 말이야. 어-"
영주만 보면 수다쟁이가 되는 선옥은 오늘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머릿속으로 복기함과 동시에 입으로 내뱉는다. 영주는 선옥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 선옥이 커가는 모습들로 행복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유형화되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도 담길 것 같은 막내딸의 앵두 같은 입술이 옴쏙옴쏙 움직이는 것만 봐도 피로가 날아간다. 연자와 동범이도 소리를 듣고 나와 어느새 선옥의 옆구리 춤을 간질이며 재잘댄다. 영주는 말없이 순기에게 다가가 다정히 어깨를 감싼다. 그의 소리 없는 인사가 순기를 위로한다. 순기도 영주의 등을 어루만지며 그의 하루를 가늠해 본다. 국민학교 선생님인 영주는 늘 올곧고 바른 남자다. 아이들에겐 더없이 부드럽고 넓은 사람이지만 불의한 상황에서는 항상 소신을 지키며 살기 원한다. 그의 그런 점을 순기는 아낌없이 사랑한다. 순기의 괄괄한 성미를 보다 둥글게 채워주는 이가 영주였다. 배움을 즐겁게 여기고 남의 흠이 당신의 흠이 되지 않도록 말을 아끼는 영주는 그가 낳은 네 명의 아이들에게 당신이 여태 가르친 아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