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유나의 단잠
유나는 며칠 뒤 드디어 인도에 간다. 일주일의 휴가를 위해 야근을 밥 먹듯 했지만 꿈에서도 선연한 인도 땅을 밟을 수 있다는 기쁨에 설레 피로도 잊은 채 일을 해치웠다. 인도로 떠나기 전 마지막까지 회사에 남아 잔업을 처리하고 새벽같이 공항으로 나섰다. 이번 휴가는 모니카의 가족들과 함께 할 예정이다.
몇 해 전 유나는 인도에서 잠깐 살았던 적이 있다. 벌써 햇수로 7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 당시 사귀었던 인도 친구들 중 모니카가 있었다. 여러 친구들이 있었지만 자신과 닮은 면이 많은 모니카에게 유나는 마음이 갔다. 어색한 영어로 그녀와 주고받는 대화가 서로의 마음에 꼭 맞았다. 해가 바뀌고 사는 나라가 달라져도 또 만나면 당장 어제 헤어진 친구 같았다. 코로나로 몇 년을 못 보다 이제야 인도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어지러운 마음을 이번 휴가로 정리하고 와야지. 유나의 마음은 이미 인도 땅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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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의 집은 인도 델리에서도 국내선 비행기를 한 번 더 갈아타야 나오는 보팔에 위치했다. 한국에서 델리공항까지 비행기를 타고 꼬박 8시간을 날아왔다.
"8시간이면 직장인의 하루 노동시간인데..."
공항 구석에서 유나는 장시간 비행 동안 작게 접혀 있었던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풀어주었다. 이제 보팔로 가는 비행기만 타면 된다. 하지만 델리공항은 왜 이리도 넓은지, 국내선을 타려면 다른 터미널로 이동해야 한다고? 넉넉하게 잡았다 생각한 환승시간이 갑자기 촉박해졌다. 다급하게 이리저리로 뛰었다. 호객을 하는 택시 기사를 고사하며 지나가던 외국인을 붙잡고 국내선 터미널을 갈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친절한 안내에 땡큐! 땡큐!를 외치며 뛰어 떠나려는 공항 셔틀에 겨우겨우 올라탔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유나의 가슴이 긴박함에 한껏 작아졌다. 올 때마다 인도는 유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이부자리에서 추억하며 웃을 일이라 생각하니 창가에 비친 유나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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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한국에서 날아온 친구를 맞이하기 위해 모니카의 가족은 각자 일주일 간 휴가를 냈다. 모니카의 아버지와 모니카, 모니카의 동생 무쿨까지. 혈혈단신의 몸으로 멀리 인도, 그 넓은 땅에서도 모니카가 있는 보팔까지 와준 유나가 모니카는 참 고맙다. 모니카의 어머니는 작년 5월 생을 달리했다. 코로나 확진으로 인해 입원해 계시다 퇴원하는 도중 심장마비로 돌연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코로나에 확진되어 격리 입원 치료 중이던 모니카는 어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엄마를 의지했던 모니카는 홀로 병실에 남아 얼굴을 이불에 파묻을 수 밖에 없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담담히 슬픔을 말하는 모니카의 모습에 유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부고를 전하는 모니카의 언어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엄마를 잃어보지 못한 그는 모니카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적절할지 몰라 휴대전화를 꼭 쥔 채 고민했다. 키패드 주변을 맴돌던 손가락이 이윽고 몇 개의 알파벳을 눌렀다. '넌 괜찮아?'라는 부족한 안부 인사였다. 유나는 모니카가 불현듯 느낄 슬픔이 어떨지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유나를 필요로 할 때 손에 닿을 거리에 있겠다 약속했다. 유나는 코로나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매일매일 모니카의 안부를 물었지만 직접 가서 살을 맞대고 안아주는 것만큼 큰 위로가 없기에 유나는 인도에 갈 수 있는 날만을 기다렸다. 코로나에서 조금 여유로워진 지금, 보팔공항에서 유나와 모니카는 서로의 몸을 꽉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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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의 아버지와 남동생은 유나를 가족처럼 맞이했다. 유나는 모니카의 아버지를 '아부지'라 불렀다. 선한 얼굴과 인자한 미소가 꼭 아빠 같아서다. 유나와 함께 지낼 일주일이 아부지는 기대되었다. 평소 요리는 일절 하지 않는 그가 유나를 위해 주방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접시 부딪히는 소리, 물줄기로 재료를 씻는 소리,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 따위가 잠든 유나의 귓가를 간질였다. 잠에서 덜 깬 그녀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오자 아부지는 따뜻한 짜이 한 잔을 내어주었다. 향긋하고 알싸한 짜이 냄새가 이곳은 인도라 말해주었다. 유나가 밥을 먹는 동안 아부지는 그녀가 좋아할 만한 관광지들을 선별했다. 인도 문화와 미술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유나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알려주고 싶었다. 박물관이나 문화유적지에 가면 항상 현지 가이드를 대동해 그녀에게 정확한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했다. 힌디를 알아듣지 못하는 유나는 아부지가 해석해 주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좋아하는 인도를 마음껏 즐겼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순간에도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열심히 알려주던 아부지에게 유나는 어른의 어짐을 엿보았다. 유나가 선물한 셔츠를 그녀가 떠나는 날까지 입던 아부지였다. 배불뚝한 인도 아저씨가 유나를 딸처럼 귀하게 여겼다.
"너에게 청혼할래."
유나는 모니카의 남동생 무쿨에게 청혼하겠다 선언했다. 유나가 사려고 하는 모든 것을 슥- 보고 슥- 나타나 슥- 결제하는 그를 보고 청혼하지 않는 게 더 힘들 정도였다. 시작은 파니르 커리였다. 보팔에 도착해 집에 도착하니 스러질 듯 피로가 몰려왔다. 그런 유나를 무쿨이 불렀다. 식탁에는 김을 모락모락 내는 파니르 커리가 있었다. 짐은 나중에 풀고 밥부터 먹으라는 그를 따라 밥 한 술을 떴다. 금방 한 것처럼 따뜻한 커리와 가벼운 쌀알을 입에 넣으니 장시간 여정의 피로가 잊혀졌다. 꿀떡꿀떡 맛있게 먹는 유나를 가만히 보던 무쿨이 말했다.
"파니르 커리가 맛있다고 했던 네가 기억나서 첫 끼는 이걸로 준비했어."
언제 이 커리를 맛있다고 했는지 유나는 당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무쿨의 다정함에 집에 온 것처럼 안심이 되었다. 보팔에 있는 내내 유나는 "돈 많은 너에게 청혼할 거야!"라고 농담을 던졌지만 다정하고 세심한 그에게 언젠가 귀한 사랑이 생기길 바란다. 아니, 바라지 않는다. 아니, 바란다.. 안 바라나? 지나가는 매일 밤이 아쉬워 맥주로 밤잠을 이겨내는 유나 곁엔 늘 무쿨이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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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날 모니카는 유나의 손을 꼭 잡았다. 어린아이가 투정 부리듯 축 늘어지며 며칠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국적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친구의 그 말이 어떤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지 유나는 너무 잘 알았다. 사리를 갖고 싶다던 유나를 위해 시장 이곳저곳에서 그녀에게 어울릴만한 천을 골라 온 모니카였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아름답게 완성된 사리를 전하며 모니카는 그보다 더 큰마음을 유나에게 건네주었다. 유나가 인도에 오는 날을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렸을 모니카를 유나는 꼭 안아주었다.
들고 온 캐리어와 배낭은 모니카 가족들의 선물로 빵빵하게 채워졌다. 이렇게 사랑이 가득한 가족이 집안의 어머니를 잃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해 본다. 유나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모니카의 어머니는 아마 모니카의 아부지만큼 정이 많고 속 깊은 무쿨보다 따뜻하고 모니카처럼 사랑이 가득한 분이었을 테다. 어머니가 직접 고른 보팔 신도시의 새 집을 이젠 세 사람이 지킨다. 집 한편에는 어머니를 기리는 작은 템플이 있고 넓고 깨끗한 다이닝 벽 한가운데는 그녀를 추억하는 사진들이 걸려있다. 유나의 등장으로 내내 왁자지껄했던 집이 불쑥 찾아드는 슬픔에 잠식당하는 순간을 유나는 몰래 지켜보았다. 아내와 함께 잠들었어야 할 안방을 비워두고 작은 침대에서 쪽잠을 주무시는 아부지를 보며, 깔깔거리며 웃다 문득 켜진 무쿨의 휴대전화 배경화면을 발견하며, 다 커서도 엄마 없이 병원 가는 게 무섭다는 모니카의 농담을 들을 때 유나는 얕고 넓게 깔려 있는 그들의 슬픔과 마주했다.
일주일 동안 유나로 빛났던 집이 다시 조용해질 것이다. 유나에게 이 집을 잊지 말라고, 보팔에서의 일주일을 기억하라고 그들이 싸준 선물들이 서울 유나의 방 한 칸을 가득 채운다. 마치 잊고 지냈던 가족을 만난 것처럼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매 순간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났다. 한국에 돌아온 유나는 쉽게 그 잔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며칠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마치 보팔에 무언가를 두고 온 듯 마음이 찝찝했고 세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에 겹쳐졌다. 깨끗하고 쾌적한 서울에서의 생활보다 조금 불편하고 낙후된 그곳에서의 일주일이 오히려 편안했다. 떠나기 전엔 기대와 설렘만 가득했었는데 막상 돌아오고 이렇게까지 마음이 뜨는 걸 보니 괜히 인도에 다녀왔나 싶다. 그들과 찍은 수천 장의 사진을 유나는 내내 돌려보지 않았다. 공항 가는 길에 아부지가 손을 뻗으며 '이 길로 가면 우리가 갔던 템플이 나오고 저 길로 가면 그때 갔던 정육점이 나온단다'라는 말을 귀에 담으려 하지 않았다. 이별을 감당하며 슬픔에 골몰되지 않기 위해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8월의 서울에서 유나는 보팔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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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유나의 고양이가 둥글게 몸을 말고 유나 곁에 누웠다. 유나도 눈을 감고 고양이의 털을 가지런히 쓰다듬었다. 고요 속에 있는 방이 어쩐지 편안하게 느껴졌다. 순간 유나의 방이 환한 보랏빛으로 둘러싸이더니 누군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이는 모니카의 어머니였다. 건강한 얼굴로 고운 사리를 입은 그녀가 유나의 방으로 들어왔다. 유나가 모로 누워있는 침대맡에 다가와 그녀의 이불을 덮어주고 유나의 이마에 흩어져있는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가늘게 잔주름이 가 있는 그녀의 손이 유나를 스칠 때마다 잠이 몰려왔다. 더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위로였다. 깜짝 놀라 눈을 떴을 때엔 모든 게 정지된 것 같았다. 옆에 있는 고양이도, 보랏빛에 싸였던 유나의 방도 모두 꿈속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모니카의 어머니가 정말 다녀가셨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마음이 평안 속에 있었다. 모니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머님이 내 꿈에 다녀가셨어. 그리고 잠든 나를 토닥여주셨어." 모니카는 답했다.
"고마워, 유나."
이제 유나는 안다. 모든 걸 제치고 모니카에게 달려갔던 자신이 원한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인천공항에서 델리공항을 거쳐 보팔까지 단숨에 날아간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게 어떤 것인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몰래 모니카의 수납장에 숨겨둔 자신의 은반지와 편지가 전할 위로가 모니카에게 어떤 것일지 유나는 깨닫는다. 이렇게 지내다 다시 만나면 된다. 각자의 자리를 충실히 지키다 적절한 시기에 다시금 서로에게 안부가 되어주면 될 것이다. 유나는 꿈같던 보팔에서의 일주일을 마음속에 넣어둔다. 퍽퍽한 현실이 버거울 때 가끔 꺼내어 볼 것이다. 색이 바래져도 먼지가 소복이 쌓여도 유나를 지켜줄 기억이다. 오늘 유나는 단잠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