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지근한 거실 바닥에 알몸으로 누워 있다. 끈적한 맨살이 마룻바닥에 들러붙어 몸을 움직이면 살갗이 바닥에 들러붙었다 떨어졌다. 머리맡에 선풍기 두 대를 틀었지만 뜨끈하고 텁텁한 바람이 답답하기만 하다. 두루마리 휴지를 머리에 베고 나는 대자로 누워 있다. 바닥과 살이 붙은 부분에 땀이 찬다. 팔과 몸이, 허벅지와 종아리가 붙지 않도록 잘 널어뒀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내 신체와의 접촉마저 불쾌하다. 가만히 있는데도 여차하면 땀을 내뿜을 것 같다. 내 땀구멍은 나의 움직임을 노리고 있는 모양이다.
한 평 남짓한 공간, 내 옆에 나와 똑같이 널려있는 그를 본다. 역시나 마룻바닥에 사지를 잘 펴 널어 놓았다. 나보다 훨씬 긴 그의 팔다리는 내가 누워있는 자리보다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바닥에 떨어진 고양이 털이 그의 등과 어깻죽지에 덕지덕지 붙었다. 뜨거운 그의 몸에 붙어있는 털을 떼어주다 당최 떨어지지 않아 그만두었다. 그가 말했다.
"내가 만세하고 대형 돌돌이가 되어서 바닥에 털을 다 청소하는 거야, 어때?"
그의 실없는 소리에 풋- 하고 웃어 버린 내가 싫다. 아, 우리의 800일은 마룻바닥이구나.
여름은 에어컨이다. 여름의 주인은 에어컨이다. 누가 해수욕이 여름의 묘미라 했나, 누가 작열하는 태양이 여름의 맛이라고 했느냔 말이다. 땀범벅이 된 채 집에 돌아오니 망가진 에어컨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자그마치 8월이라고. 먹통이 되어버린 에어컨 리모컨을 때리고 던져도 꿈쩍하지 않는다. 최후의 수단으로 차단기를 내렸다. 일순간 암전이 된 집에 고양이가 눈을 빛내며 두리번 거린다. 입으로 10을 센다. 1, 2, 3... 다시 차단기를 올리고 에어컨의 전원을 켜본다. 띠리링-. 투명하고 밝은 에어컨의 음색에 기분이 조금 누그러진다. 냉방 18도. 위이잉 하며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에 쾌재를 불렀다. 이제 시원해지기만 기다리면 된다. 옷을 벗고 청소를 시작하는 와중에 꿉꿉한 냄새가 방을 가득 채우는 걸 느낀다. 에어컨 날개에 손을 대어 보니 미지근한 바람이 밀려 나오고 있다. 급히 실외기에 귀를 가까이 대어 본다. 우우웅 거리며 돌아가던 실외기가 잠시 후 꺼진다. 실외기 팬만 하릴없이 맨 바람을 일뿐이었다.
한 여름의 에어컨 고장은 한 줌 있던 마음의 여유도 제 것인 양 휙 빼앗아 버렸다. 만물을 범애하던 나는 멈춰버린 에어컨 앞에서 마음이 좁아지고 작아져 몸에 딱 맞는 관짝에 들어가 있는듯했다. 내키는 대로 숨을 쉴 수도 없고 뒤를 돌아볼 수도 없는 환경이다. 실외기를 실내에 설치해야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내 무지함이 덫이었다. 가뜩이나 공기의 흐름이 제한되는 실내에서 열기를 내뿜으며 돌아가는 실외기가 여태까지 살아있던 게 천운이었던 것이지. 걸치고 있던 옷을 뜯어내듯 벗어던지고 욕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그 와중에 차가운 물을 갑자기 맞으면 심장에 무리가 갈까 싶어 손발부터 적신 후 물 세수를 하는 나의 조심성이 조금 웃겼다.
아, 진짜 시원하네. 머리카락 가닥가닥 빈틈없이 찬물을 뿌려준다. 두피에 가둬져 있던 열기가 차가운 물로 씻겨 내려간다. 머리카락 뿌리 쪽을 적신 차가운 물줄기는 매끄럽게 흘러 미지근하게 툭 떨어진다. 까슬까슬한 샤워타월에 바디워시를 듬뿍 묻혀 고운 거품을 내고 땀으로 간질간질하던 온몸을 벅벅 밀어준다. 팔뚝, 손가락 분지 사이사이, 겨드랑이, 동그란 배, 땀 방울이 흐르던 가슴골까지 박박 밀며 세신(洗身)의 의미를 되새긴다. 몸에 '붙어'있는 때를 미는 일. 살가죽 사이사이 붙은 때가 깨끗이 제거될 만큼 열심히 씻고 나면 너무나 개운한 마음에 삶이 보람찬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물론 물기를 닦고 거실로 나오면 욕실에서의 모든 노력이 다시 상쇄됨을 느끼곤 한다. 에어컨이란 삶의 질에 엄청난 관여를 하는구나. 나는 여름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에어컨이 있는 여름을 사랑하는 거였네, 힘없이 되뇌어본다.
머리카락이 잘린 삼손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에어컨이 고장 난 집에 누워있는 나는 힘없는 삼손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고 싱거운 상상을 해본다. 무언가 할 엄두가 나지 않는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건다. 유난히 몸이 뜨겁고 열이 많은 그가 주말 동안 에어컨 없는 우리 집에서 보내야 할 지난한 주말이 불쌍해서다. 배짱 두둑한 그는 호기롭게 괜찮다 말한다. 에어컨을 쐬기 위해 가는 게 아니지 않느냐 말한다. 수화기 속 호방하게 웃던 그는 지금 나와 함께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더위가 우릴 무기력하게 한다. 아니 믿었던 여름의 배신인가. 아니면 다년간 에어컨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고질병인가. 더위에 사로잡힌 우리는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 슬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와 단골 노래방에 간다. 냉기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작은 노래방에서 차례를 지키며 열창을 하고 오늘 목 컨디션이 안 좋네 따위의 얘기를 하는 나는 이제야 조금 행복해진 것 같다.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을까 하는 우리 앞에 길거리 야채곱창 트럭이 마법처럼 나타났다. 그래, 야곱의 축복이지. 1인분 포장이요. 검정 비닐봉지 속에서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는 야채곱창의 깻잎 냄새와 들깨가루 향이 좋아 자꾸만 코를 갖다 댄다. 당면이 가득 든 만 원짜리 야채곱창에 더위가 싹 물러간 느낌이다. 이거 완전 맥주 당기는 맛일 거야. 곧장 편의점에 들러 시원한 캔맥주 4캔을 샀다. 에어컨 없는 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이다. 집에 도착한 우리는 입고 있던 옷을 훌렁 재껴 욕실로 직행한다. 그에게 맥주는 냉동실로!라고 다급히 소리치며 욕실로 들어간다. 끝까지 비틀어진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냉수가 잠깐의 산책으로 끈적해진 몸을 식힌다. 뜨거운 몸을 타고 흐르는 찬물이 미지근해져 하수구로 흘러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세신을 즐겼다. 좁은 욕실에서 서로의 몸이 포개지지 않도록 비껴가며 시원하게 냉수마찰을 하고 나오니 에어컨 없이도 훌륭한 여름밤이 되었다.
선풍기를 한 대씩 차지하고 물기를 말린 뒤 야채곱창을 꺼낸다. 아직도 뜨거운 우리의 야곱은 만 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양을 뽐내며 접시 밖으로 넘치기까지 한다. 냉동실에서 0도를 향해 얼어붙던 맥주를 꺼내 유리잔에 가득 따른다. 콸콸콸 따라도 거품이 생기지 않는 걸 보니 제대로 시원해진 모양이다. 맥주를 담은 유리잔이 시릴 정도여야 제격이야라고 말하며 함박웃음 짓고 짠을 외친다. 어느새 선선해진 여름밤에 모든 것이 용서된다. 우리 800일 이 정도면 멋지다, 그치?
처음엔 6평짜리 벽걸이 에어컨이 고장 난 것이 이렇게 불운할 일인가 했다. 하필 AS 센터도 일주일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이 한 여름에 더위 속에 던져질 나와 내 고양이가 참으로 안타까웠다. 어느 날엔가 집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고소한 찐 옥수수 냄새가 났다. 이건 보통 옥수수가 아니다 하며 냄새가 이끄는 쪽으로 다가갔다. 작은 그늘에 간신히 햇빛을 피하고 있는 찐 옥수수 노점상이 있었다. 그 앞에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반바지 차림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고 계셨다. 찜기가 놓인 수레에는 미리 쪄놓은 옥수수 꾸러미가 들어 있었다. 찜기는 고무줄이 달린 비닐로 싸여 있었는데 거기에선 엄청난 김이 뿜어져 나왔다. 여름에 노점도 대단한데 옥수수 찜기라니... 근처로 다가가니 뜨거운 열기가 내 얼굴에 훅 끼쳤다. 찐 옥수수 이천 원어치 주세요. 큼지막하고 실한 찰옥수수 두 개를 무심코 받아드니 손이 데일 뻔했다. 손가락 끝으로 봉투 끄트머리를 고쳐 잡았다. 고소하고 오동통한 찰옥수수를 집에서 맛있게 먹었다. 옥수수를 다 먹을 때 즈음 문득 옥수수를 파시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잠깐의 적막이 나를 둘러쌌다.
하루는 지하철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가던 참이었다. 갑자기 비릿한 냄새가 숨에 섞여 들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위로 올라갈수록 비린내는 심해졌다. 후텁한 날에 사방에 풍기는 비린내가 역하기까지 했는데 지하철 입구에 올라오니 그 이유가 보였다. 나보다 훨씬 키가 작은 한 노인이 오래된 캡 모자를 쓰고 아이스박스에 가득 담긴 갈치를 팔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순간 불쾌감이 밀려들었다. 왜 하필 저기에서 갈치를 파는 거지. 퇴근시간이라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모두 흘긋흘긋 그를 쳐다봤다. 그는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갈치 대가리를 맨손으로 들어 가위로 능숙하게 손질하고 있었다. 그의 현란한 가위질에 왠지 멍하니 그의 기술을 보고 있게 되었다. 한 아주머니가 그에게 다가와 갈치 몇 토막을 주문했다. 이내 노인은 기다란 은빛 갈치 대가리를 잡고 능수능란하게 가위질을 시작했다. 노인의 손에서 갈치의 지느러미와 꼬리는 잘리고 몸통을 여러 개로 토막나 졌다. 그의 가위는 모든 걸 다 자를 수 있어 보일 만큼 잘 들었다. 끝이 뭉툭한 노인의 손가락에 다사스러운 그의 세월을 실감한다. 그는 갈치를 비닐봉지에 담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노인은 무릎께를 넉넉히 덮는 헐렁한 반바지 차림이었고 그의 체구는 초등학생이라 해도 될 만큼 작았다. 멀거니 보이는 그의 종아리는 너무나 앙상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오랜 고요가 나의 주변을 맴돌았다.
하루 8시간을 에어컨이 빵빵한 회사에서 일하는 내가 에어컨이 망가졌다고 토해낸 온갖 불평이 부끄러웠다. 일상 속 편의가 언제부터 내게 당연한 것이 되었을까. 전기세가 너무 비싸 에어컨은 상상조차 못하고 선풍기로만 열대야를 지냈던 나의 동남아 유학시절은 어느새 남의 일이 되었다. 어느 누군가는 이 더운 여름에 찜기 앞을 지키고 다른 누군가는 후텁한 날씨 속 생선 비린내를 풍기며 제 몫을 챙긴다. 어떤 이는 누군가 생각 없이 던져놓은 박스 더미를 찾으며 몇 푼을 벌고 어떤 이는 에어컨이 또 말썽이라며 짜증을 내는 고객 앞에서 땀에 전 자신의 양말에 그의 눈치를 살핀다. 조금만 넉넉해지기로 하자. 삶이 불편해지는 지점이 와도 조금 여유롭게 행동하기로 하자. 지난 며칠간 에어컨이 고장 난 후텁한 집에서 상념에 빠졌다. 각자의 자리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 참 어렵다. 원래 갖고 있던 것을 조금만 빼앗겨도 역정을 내고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달라지기는 힘이 든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름의 냉기가 당연한 것이 아닌데 말이다. 사랑과 행복을 모티프로 삼은 이야기꾼의 모순이다. 한 여름 에어컨의 역습이 날 한 방 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