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순기 - epi. 10
찬바람이 콧등을 간질여 순기는 연신 재채기를 해댔다. 올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이 연이어 이어지고 있으니 따끈한 만둣국 한 그릇 푹 끓여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은 마음으로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 6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평생을 새벽 4시에 일어났는데 요 며칠 날이 추워져서인지 잠이 쏟아지곤 한다. 커튼을 젖히니 해가 뜨지 않아 아직 어둑어둑한 거리가 가로등 불빛에 가까스로 모습을 내보인다. 잰걸음으로 출근을 서두르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왕 늦게 일어난 거 동범이 아침밥이나 챙겨주고 나가야겠다며 순기는 가스불에 물을 올렸다. 엊그제 동범이 순기의 집에 들어왔다. 혹시 몰라 동범에게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는데 용케도 기억해 냈다 싶어 내다보니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턱을 덮고 눈가가 퀭해서는 거리에서 며칠 밤을 보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원래 제 배알 꼴릴 때 나갔다가 돈 필요하면 기어들어오는 동범이라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도 않았다. 동범의 더러운 양말을 빨고 뜨거운 김칫국을 해먹이니 뭐가 그리 피곤한지 작은방 침대에서 금방 곯아떨어졌다.
요전 날 예선전을 치르고 경연장을 나오자 순기의 두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얼마나 몸에 힘을 주고 불렀는지 목덜미가 뻐근했다. 순기가 풀썩 의자에 주저앉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옥은 깜짝 놀라 기선을 안아든 채 순기 옆으로 다가왔다.
"엄마, 괜찮아? 너무 떨렸지? 고생했네, 우리 엄마." 둥그렇게 순기의 몸을 감싸는 선옥의 따뜻한 품에 순기의 긴장이 한결 풀렸다. 바닥을 보고 폭폭 숨을 내쉬다가 순기는 선옥의 얼굴을 멀거니 들여다봤다. 예쁜 우리 선옥이...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다 깬 것처럼 몽롱하고도 개운했다.
"잘하고 나왔어. 떨리기도 떨렸는디... 모르겄다. 꿈꾼 것 마냥 몽롱허네. 허허... 우리 똥강아지랑 밥이나 먹으러 가자!"
잘했는지 어쨌는지도 모르게 마음은 개운했다. 노래를 부르면서 영주의 얼굴이 보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인데 그 얼굴에 의지하며 가락을 욌더니 금세 편안해졌다. 하지만 어둠 속에 영주가 점점 사라지려고 해 노래의 끝 무렵부터 긴장한 채 그의 모습을 좇았더니 노래가 끝나자 기운이 쫙 빠져 버렸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민요 선생님이 순기를 꽉 끌어안는 탓에 얼결에 경연장을 나오게 되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몇 년 째 통 안 보이던 동범이 순기의 집에 들어오고 미운 놈도 내 자식이라 또 만둣국 한 솥을 끓이고 있다.
작은방에서 자고 있는 동범을 깨웠다. "엄마 식당가니까 인나문 만둣국 한 그릇 떠먹어라." 동범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자는 척을 했다. 다 늙은 자식 걱정하는 자신이 웃겨 방문을 닫고 나왔다. 오늘은 문화센터 노래자랑 예선 합격자 명단이 공개되는 날이다. 기대하지 말자고 아무리 마음을 잠재워도 어느새 먼지처럼 풀풀 흩어져 날아다니는 기대감이 순기를 자꾸 들뜨게 만든다. 만둣국 한 사발을 신 김치와 뚝딱 먹고 오라이식당으로 향했다. 어젯밤 닦아둔 손님상을 행주로 한번 더 닦고 멸치를 잔뜩 넣어 육수를 끓이기 시작했다. 택시 기사들의 사랑방이 된 오라이식당은 오전부터 오후까지 꼬리를 물고 들어오는 택시 기사들로 소리 없이 바빴다. 기사식당은 쉬는 시간 없이 연이어 영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몸은 피곤하지만 손님이 단체로 몰리지 않아서 무리는 안 간다. 오늘 팔 음식 재료를 손질하고 볶고 익히니 손님이 하나둘 오라이식당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손님이 잦아든 오후, 식당 문을 잠시 닫아두고 순기는 앞치마를 벗었다. 순기는 이때만을 기다렸다. 문화센터에 달려가 합격자 명단을 확인할 시간. 헐레벌떡 도착한 문화센터 게시판에는 이미 본선 진출자 명단이 붙여졌다. 순기는 침을 꼴깍 삼키고 합격자 명단 종이를 검지로 위에서부터 쓸어내려 가며 자신의 번호를 찾았다.
참가번호 18번 김순기.
찾았다. 스무 명도 안 되는 본선 진출자 명단에 분명 순기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손뼉을 마주치고 발을 동동 구르고 마른 세수를 몇 번이나 하고서야 꿈인지 생신지 가늠이 안 가는 이 순간의 현실감을 되찾았다.
"오메에... 엄마야.. 내가 예선에서 합격한거여?" 순기는 믿을 수 없어 눈을 꾹 세게 감았다 뜨고 게시판에 붙은 벽보를 연신 매만졌다. 그 사이 어느새 순기의 뒤에서 서 있던 진화 엄마가 순기의 등을 찰싹찰싹 때리며 또 얄궂은 주둥이를 놀렸다.
"어머! 오라이 아줌마 합격이네~ 그렇게 연습 안 했다고 시치미 떼더니 말이야. 우리 무리에서는 오라이 아줌마만 합격했잖어~ 아주 가만 보면 세상 여우라니까! 오늘 커피라도 한잔 쏴야 되는 거 아니야? 나는 그때 오전 반이라 컨디션이 안 좋았었다니까. 내가 오전에는 목 컨디션 안 좋다고 오후 반으로 해달라고 아주 사정을 했었는데, 민요 선생님이 시간을 잘 못 짜줘가지고... 아까워 죽겠네 그냥. 시간이 문제였어, 시간이! 어휴, 진짜 안 그랬으면 나도 본선 진출인데 말이야. 웃겨, 진짜."
평소 같았으면 진화 엄마의 주둥이를 상상 속에서 열심히 꿰맸을 테지만, 순기는 지금 진화 엄마가 중요한 게 아니다. 명단에 적힌 이름들을 다시 한 명씩 되뇌어보고 있노라면 더, 더 기쁘다. 합격자들의 반은 동요를 부른 꼬맹이들이었으니 말이다. 그 많던 중년의 여성 참가자들은 거의 대부분 탈락하고 민요 교실에서도 남다르게 노래를 잘했던 몇몇 학생들만 본선에 진출했다. 그 속에 순기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진화 엄마가 몇 번이고 오전이니 오후니 시간 탓을 하고, 커피를 쏘라느니 어쩌라느니 설레발을 쳐도 전혀 들리지 않을 만큼 기뻤다. 본선에서 무슨 노래를 또 준비해야 하나, 행복에 겨워하고 있는 그때 순기의 오래된 폴더 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신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아 드는데 낯선 목소리가 순기를 찾았다.
"김순기 씨 되십니까? 서대문 경찰서입니다. 장동범 씨 보호자 되시죠? 장동범 씨가 술을 드시다 시비가 붙어서 신고가 들어왔어요. 근데 지금 술에 많이 취하셔서 제대로 진술을 할 수 없는 상태라 보호자님께 연락드렸습니다. 지금 이쪽으로 오실 수 있나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동범은 방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왜 경찰서에 붙들려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순기의 뒤통수에 어디 가냐고 카랑하게 소리치는 진화 엄마의 말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순기의 가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크로스백 끈이 답답해 손에 둘둘 말아올리고는 서대문 경찰서로 달려갔다. 경찰서에 내려 계단을 오르며 순기는 제발 별 일이 아니길 빌었다. 차라리 무소식이 희소식이었지. 왜 이 늙은 엄마를 찾아와 경찰서까지 쫓아오게 만드는게냐. 순간 순기 오른발이 움푹 팬 시멘트 계단 바닥에 걸렸다. 순간 기우뚱하고 중심을 잃은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굴러 떨어졌고 이윽고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힌듯 텅 하고 울렸다. 눈과 코에서 짜고 메케한 맛이 났다. 뜨거운 어떤 것이 줄줄 흐르는 느낌도 났다. 이 모든 순간이 아주 느리게, 쓸데없이 명확하게 기억에 인지되었다면 믿어줄 텐가.
*
종로의 재래시장에서 오라이식당은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다. 낮에는 알음알음 근처 상인들의 점심 식사를 책임지는 평범한 백반집이었지만 저녁에는 순기의 '빨간 고기'로 대박이 났다. 순기의 빨간 고기는 연자가 아주 좋아하던 별식이었다. 고기를 안 좋아하던 영주는 꼭 나물과 된장으로 밥을 먹었는데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연자와 동범이는 항상 고기를 먹고 싶다 노래를 불렀다. 그럴 때면 순기가 골목 정육점에서 뒷고기를 얻어와 구워주곤 했는데, 뒷고기라 그런지 돼지 잡내가 많이 나서 소주도 뿌려보고 마늘과 함께 구워도 봤지만 어딘가 구리구리한 냄새가 또 올라왔다. 어떻게 하면 이 잡내를 잡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 맛이 강한 고추장 양념을 발라 구우니 달짝지근한 것이 매콤하기도 해 잡내가 가려지고 오히려 감칠맛이 돌았다. 특히 연자가 이 빨간 고기를 참 좋아해 학교 갔다 오고는 항상 순기에게 "엄마, 빨간 고기해주면 안 돼?"라고 채근할 정도였다. 종로에 오라이식당을 열었을 때 연자는 순기에게 말했다.
"엄마, 여기는 시장이잖아. 예전 오라이식당처럼 백반을 해서는 승부가 안 날 거야. 싸고 마진이 많이 남는 고기를 팔면서 술을 먹게 해야 해. 왜, 그 엄마가 예전에 자주 해주던 빨간 고기! 그거 저녁에 팔면 술을 마실 수 밖에 없을걸? 그럼 진짜 금방 대박 날 거라니까!"
사실 술을 팔으라는 연자의 말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술은 돈이 되긴 하지만 안 볼 꼴, 못 볼 꼴 다 보게 되기 때문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순기는 오라이식당 입구에 3계명을 내걸었다.
<오라이 3계명>
하나, 1인 소주 한 병만! 잠은 집에 가서 주무소!
하나, 우리 집 귀한 딸들 말고 오라이 아지매를 찾아주이소!
하나, 외상 사절, 맞돈 오라이!
순기의 걱정으로 장난스레 내건 오라이 3계명이지만 손님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술 먹고 진상 부리는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고 그로 인해 젊은 손님들이 편하게 오라이식당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술을 판대도 순기의 손님 사랑은 변함없이 뜨거웠다. 쌀쌀하니 추운 날에는 아침부터 팔팔 끓인 멸치 육수에 어묵과 무를 숭덩숭덩 잘라 넣은 오뎅국을 서비스로 내주었고, 술을 더 먹겠다고 성화인 손님에게는 머리까지 얼얼하게 시원해지는 식혜를 한 사발 건네었다. 연자가 제안한 순기의 빨간 고기도 이미 그 명성이 종로 시장 바닥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 원래 양념 고기는 빨리 타버려 불판이고 고기고 숯덩이가 되기 일쑨데 미리 초벌을 해둔 순기의 빨간 고기는 손님상에서 맛있는 정도로만 익히면 돼 바쁜 시장에 안성맞춤인 메뉴였다. 빨간 고기를 한 테이블이라도 굽고 있으면 연이어서 손님이 줄줄 들어올 만큼 오라이식당 근방에는 빨간 고기의 맛있는 냄새가 꽉 잡고 있었다.
그렇게 저녁에 고기 장사를 시작한 오라이 식당의 인기는 고공행진이었다. 그러니 귀신같이 돈 냄새를 맡은 동범이 슬금슬금 기어들어왔다. 성인이 된 이후로 동범은 식당에 떼인 돈 받으러 오는 빚쟁이 같았다. 순기가 잠깐 가게를 비운 사이 식당에 들어와 오라이 아지매 아들이라고 털털 웃으며 금고에 든 돈을 털어가는 일이 빈번했다. 몇 번은 눈감아줬지만 종로에 와서부터는 큰돈은 금고에 돈을 두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나타나 돈을 빼돌릴지 모르니 아예 속옷 깊은 곳에 넣어 두었다. 몰래 돈을 못 빼가니 동범은 순기 앞에 나타나 선옥을 가지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아, 빨리 잔말 말고 돈이나 달라고! 요즘은 금고에 돈도 안 두던데 그럼 내가 돈을 어디서 어떻게 가져다 쓰겠어! 선옥이 이놈의 계집애 납치해다가 콩팥 하나 떼어서 팔아버리기 전에 돈 내놓으라고!!!"
그때는 그런 말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하던 시절이었다. 홀연히 사라진 젊은 청년이 장기 몇 개 털린 채 강가에서 발견되는 일들이 아주 흔하게 일어났던 시절. 인신매매가 암암리에 기정사실화되던 날들이었다. 순기는 돈 몇 푼 쥐여주고 동범을 서둘러 돌려보냈다. 그리곤 선옥에게 앞으로 가게에 들르지 말라고 당부한 적도 아주 많았다. 몇 달에 한 번씩 동범은 다시 똑같이 오라이식당에 돌아와 순기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말을 던진 뒤 몇 푼의 돈을 얻어 갔다. 왜 항상 아들에게 지는지 순기 자신도 모르겠으면서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