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쫄지 마
어떤 날은 주변의 모든 것들이 칼날처럼 뾰족하게 느껴진다. 친구가 써준 다정한 이메일 편지가, 스마트폰 화면 안에 얼핏 뜬 광고 글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책 가지에서 나오는 문장 한 줄도 가시처럼 따갑게 날 찔러댄다.
네가 뭐라고 글을 쓴다고 나대니?
평범한 장면들 속에 녹아든 여러 사람들의 글을 눈으로 훑다 그만 포기하고 싶어진다. 독서 인구가 매해 최저를 갱신한다고, 젊은이들의 문해력이 유래 없이 낮아져 간다고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도 매주 수십 권씩 쏟아져 나오는 신간들은 또 누군가에게 선택되고 읽어질 테다. 누군가가 쓴 가지런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만큼 쓰지 못하는 자신에 실망스러워 한숨만 나온다. 내 글의 경쟁력은 무얼까. 누가 내 글을 읽어줄까. 골라집어 든 책을 읽다가 또 화가 난다. 이 사람, 글 정말 샘나게 잘 쓴다. 어떻게 자기가 사람을 죽여본 것처럼, 과거로 돌아가 시간 여행을 하다 온 것처럼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을까. 나는 고작 매주 소설 한 단락 쓰는 것도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만큼 어려웠는데. 어느 때보다 활자에 둘러싸여 사는 지금, 남이 쓴 기사, 남이 쓴 편지, 남이 쓴 뉴스레터와 소설, 에세이 등에 매일매일 잠식되어간다. 넘어서려 하면 또 쌓여가고 간신히 글 더미 위로 올라가 숨 돌리기 무섭게 또 한차례 쏟아지는 활자에 나는 체념한 채 머리 위 공간을 내어준다. 나의 것을 쏟아낼 겨를도 없이 쌓이고 또 쌓이고, 그렇게 잊히고 무뎌진다.
작년 이맘때 나는 호기롭게 글을 쓰겠다 다짐했다. 그렇게 일 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서른 편의 짧은 글을 여러 사람들에게 발송했다. 부끄러움도 몰랐다. 문장 부호가 모자라고 띄어쓰기가 과하고 간간이 눈에 띄는 오타와 오류들을 발견해도 오늘도 또 한 편 발송했다는 기쁨에 부끄러울 새가 없었다. 새 글을 보내면 이따금씩 오는 답장들이 풍선처럼 커져있는 나의 가슴에 또 입김을 불어 넣었다. 정말 내 마음 같다며, 공감해 주고 응원해 주는 순한 마음에 나는 언제까지고 이렇게 글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 든다. 몸뚱어리가 늙고 병들지언정 내 활자와 글들은 세상에 남아 유영하듯 존재했으면 좋겠어. 이렇게 질기고 오랫동안 글을 쓰다 보면 할머니가 될 때 즈음에는 책 한 권이라도 내 보겠지, 하며 부푼 마음을 쓰다듬었다.
주말 아침, 아무도 없는 회사에 출근한 나는 자리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 곧장 동물실험실로 향했다. 중앙 실험실을 통과하고 세척실과 세포 실험실을 지나면 이중의 문으로 잠겨있는 동물실험실이 나온다. 문과 문 사이 공간에서 사무실용 슬리퍼를 벗고 동물실용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바닥에 붙어있는 끈끈이 매트에 대충 발자국을 찍고 실험실로 들어갔다. 천장의 음압시설로 창문 하나 없이 내부 공기가 밖으로 빨려나가는 실험실은 무더운 여름에도, 한파가 다녀간 추운 겨울날에도 늘 비슷하게 답답하고 서늘하다. 익숙한 동선을 지나 파란 니트릴 장갑을 끼고 에어컨을 켰다. 동물실험실 안에는 작은 동물 사육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사육실 문을 열고 랙 칸칸이 들어있는 마우스 케이지를 살펴본다. 동절기에는 실내 습도가 많이 떨어져 매일 가습을 해주는데도 떠 놓은 물이 마를 정도다. 다시 물을 채워 넣고 대형 가습기 물통에 물을 넉넉히 부어줬다. 오늘 상태를 평가할 마우스 케이지를 다 꺼내고 투여가 필요한 마우스들은 한 쪽에 빼두었다. 냉장고에서 미리 제조해 놓은 약물을 꺼내 가는 시린지로 옮겨 담는다. 탁탁. 시린지 안에 들어간 공기를 빼낼 때 내가 간호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주삿바늘 끝까지 약물이 차오르면 마우스 한 마리를 꺼내 한 손으로 등 쪽을 움켜잡고 배가 내 보이게 자세를 고정한다. 지금 진행하는 실험의 쥐들은 꼬리부터 서서히 마비가 시작되어 점차 하반신이 마비되고 심할 경우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중증도를 가진 모델이다. 가끔은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체중이 빠져 밥도 물도 먹지 못하고 꼼짝없이 누워만 있는 쥐들도 있다. 이들이 실험실로 도착했을 때 얼마나 건강했는지 빠르게 도망가는 쥐들을 허둥지둥 잡았었는데. 사람이란 참 무섭다. 그들은 단 며칠 만에 하반신 마비, 불구 상태가 되었다.
사람에게서 흔히 발병하는 면역 질환을 재현하기 위해 신경막을 구성하는 단백질에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을 섞어 쥐에게 주입한다. 끈적한 점성을 가진 약물이 천천히 물질이 쥐에게 침윤되도록 머리 쪽과 골반부에 한 번 찌른다. 이와 더불어 전신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 복부주사로 이틀에 걸쳐 투여하면 며칠 지나지 않아 쥐들은 꼬리부터 서서히 마비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종잇장 같은 쥐들의 꼬리를 잡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나는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서른에서 몇 년만 지나도 무언가에 도전하기 더 힘들어질 텐데 과연 이 쥐들 속에 묻혀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나를 먹여 살리는 이 가엾은 쥐들이 언제까지고 월급을 내어 줄까. 그렇게 빈 사무실의 불을 끄고 퇴근을 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참 많다. 소설도 쓰고 싶고 책도 내보고 싶고 언젠가 사업도 해보고 싶다. 친구와 함께 좋아하는 카페에 앉아 이런 말을 했더니 그녀는 나에게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좋겠다고 했다. 몇 년간 열심히 일로 달려온 친구는 그만 번아웃이 와 버렸다. 자신의 살을 떼어줄 만큼 일을 사랑하고 삶에 적극적이었던 친구가 모든 일에 무력해지고 무덤덤해지는 과정을 보고 있자니 인생이 대체 뭐길래 우리는 우리를 소진하며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욕심이란 단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구는 게 안타깝다. 하고 싶은게 차고 넘치는 나의 실상도 그녀와 다르지 않다. 회사가 달마다 꽂아주는 돈을 잃기는 무섭고 언제까지고 뚱하게 사무실에서 시간을 죽이고 싶지도 않다. 나보다 능력있는 사람 앞에서 위축되고 작아지고, 언제라도 대체될 수 있는 내 자리가 한심하면서도 또 제자리걸음을 하고 만다. 차라리 어렸다면 몰랐을 것들. 너무 늦은 거겠지 싶다가도 더 늦을까 봐 발을 동동 굴리는 우리.
실험이 끝나고 그와 만나 망원동엘 갔다. 아직 사람이 몰리지 않은 소품샵과 카페를 돌아보며 주전부리를 사고 별 필요도 없는 문구류들을 골랐다. 그러다 길가에 내어진 서점 입간판을 따라 홀린 듯 이층에 있는 어느 서점으로 들어섰다. 주택가 골목, 허름한 건물 이층에 위치했지만 이미 서점 안에는 책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나도 그들에 섞여 책들의 표지를 구경하고 소개말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펴보았다. 가정불화, 레즈비언, 소아비만 등 어떤 저자는 왠지 평범하지 않은 주제들로 책을 설명하고 있었다. 책을 덮고 다시 눈길을 끄는 표지의 책을 들고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별로. 이 책은? 그닥. 저 책은? 모르겠어. 정신을 차려보니 매대를 빈틈없이 채우는 출판물들은 전부 자신의 이야기가 가장 특별한 양 말하는 에세이들이었다. 서점에 있는 30분 동안 매대에 깔려있는 독립출판물의 반의반에 반도 보지 않았는데, 이들의 이야기가 다 비슷하구나 하고 깨달았다. 이렇게나 많은 책들이 세상에 쏟아져 내리는 동안 정작 책을 들춰보는 이들은 몇 명이나 될까. 그중에 돈을 지불하고 책을 집으로 들고 오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내 옆에서 나와 같이 한참 동안 책을 구경하던 그는 내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다들 하고 싶은 말들이 많나 봐."
서점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대형 출판사 도서도 아닌 개인 출판물이 책방 매대에 누워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나 어필하는데 과연 나는 이들 속에서 목소리나 낼 수 있을는지 하고 말이다. 나의 인생에는 가정불화도 없고 소수자의 삶도 없고 남들에게 동정표를 얻을 만한 굴곡도 없다.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 형형색색의 책들 중 간택이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까. 그 서점에서 내 이목을 끈 독립출판 에세이 한 권을 집어 들고 계산대에서 값을 치렀다. 14,000원. 나는 그 책을 그날 다 읽었다. 오류도 많고 잘못된 문장부호와 띄어쓰기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마치 내가 보낸 메일 같았다. 서투르고 성마른 글. 불우했던 저자의 청소년기를 지나 자기혐오가 불같이 피어나던 새내기 시절, 혼란한 성 정체성으로 그저 사랑받고 싶어 여자와 몸을 섞던 그녀의 강렬하고 자극적인 에세이는, 그럼에도, 재미있었다. 짜증나게도. 그 빳빳한 책을 다 읽고 소파에 온몸에 힘을 빼고 누웠다. 정말 싫다. 그들이 재미있는 것이. 그들만의 비밀 주머니에 특별한 이야기를 담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쏙쏙 빼어서 풀어 놓을 수 있어서 부럽다.
침대에 누워 그는 우리가 오늘 보낸 시간들에 대해 소곤거렸다. 오랜만에 여유로웠던 시간에 대해, 만족스러운 꼬치구이 집을 찾은 것에 대해, 우연히 들른 소품샵에서 건진 잡동사니에 대해 천장을 향해 흩뿌리듯 말하는 그의 옆구리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나는..."
"응."
"나는..."
"응. 의선이는?"
"나는... 글을 써도 될까?"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서 글 쓸 엄두가 안 나. 오늘 들렀던 서점에 쫙 깔려있는 책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구나 하고 위축이 돼. 그들은 이미 만질 수 있는 이야기보따리가 있는 셈이잖아. 나는 그저 몇 십 명 남짓한 독자들에게 메일을 보낼 뿐이잖아. 그게 엮여서 책이 될 수 있을까. 내 소설이 끝을 내기 포기한 마당에 할머니 소설가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쥐들을 만지고 그들의 똥오줌을 치우고 아프게 하고 또 약을 주는 사람일 뿐인데, 그게 직업인데 또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 꿈을 꿔도 괜찮을까. 스물네 살 먹은 어린 친구도 작가가 돼서 자신의 약점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책을 내는데 나는 그런 게 없어. 무기가 없어. 이런 나라도 앞으로 뭔가 쓸 수 있을까.
그의 옆구리에 고개를 처박고 한 짧은 질문은 이 모든 마음을 담은 질문이었다. 그는 가만히 내 등을 쓸어올리다 대답했다.
"쫄지 마."
쫄지 말라니. 로맨틱한 위로가 뒤통수에 입김으로 다가올 것을 기대하며 찔찔 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쫄지 말라는 단호한 호령이 가련한 내 뒷덜미를 세게 움켜쥐었다. 조금의 정적이 흐르고 이내 누가 옆구리를 잡고 간질인 것처럼 콧구멍이 벌렁거리다 푸핫 하고 웃어 버리고 말았다. 내 처연한 푸념 따위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는 이어 말했다.
"쫄지 마. 왜 남의 글 보고 쫄아. 의선이 글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남이랑 비교하려고 쓰기 시작한 글 아니잖아. 항상 재미있다고, 잘 보고 있다고 답해주는 독자들은 뭐야. 그런 마음으로는 할머니 작가 못해. 십 년, 이십 년. 여든 살이 되려면 아직 오십 년이나 남았는데 지금부터 쫄기 시작하면 어떡해. 쫄지 말고 뭐든 해봐."
그렇다. 나는 쉽게 쪼그라들고 쉽게 부푸는 바람 인형 같은 존재다. 내 글에 확신도 없고 자랑도 없고 색깔도 없다. 그래도 할머니 작가가 되겠다는 목표가 있다면 서른의 내가 겁낼 것은 없다. 나에게는 앞으로 오십 년의 시간이 있잖나. 아침부터 눅눅하게 젖어있던 내 마음을 뜨거운 다리미로 싸악 다려버린 '쫄지 마'란 한마디가 그날의 우울에서 날 건져냈다. 앞으로도 쫄지 않아야지. 나는 나의 인생을 살 뿐이고 남들이 세워놓은 성을 올려다본다 한들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또 되뇐다. 앞으로는 쫄지 않으리. 할머니 작가가 되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