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항상 여기에
우리 집에 남아있는 그의 물건이라곤 이제 양말 몇 켤레와 속옷 두어 장뿐이다. 나 몰래 이사 준비하고 있는 건지, 그저 속이 편한 건지 이사 바로 전 날까지 아무런 짐을 싸지 않는 그를 채근하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모른 척 그의 속을 살피며 애만 태울 뿐이었다. 그와 함께 살며 터득한 가정의 평화를 영위하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는 서로의 속도를 인정하는 것이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속도가 존재한다. 느리기 때문에 다 놓쳐 버리는 것도 아니고, 빠르기 때문에 꼼꼼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어련히 잘할까 생각하며 그의 채비를 기다렸다.
그가 떠난 지금 나는 오롯한 싱글 라이프를 보내고 있다. 그와 함께 산 지 벌써 1년하고도 반이 지났다. 우린 이제 따로 산다.
집의 크기는 둘이 살던 혼자 살던 똑같겠지만, 그의 흔적이 사라지자 집이 어쩐지 엄청나게 넓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쓰던, 늘 미어터지던 작은 옷장은 이제 공갈빵 마냥 텅 비어 버렸고, 나와 그의 겨울 외투가 어지럽게 얽혀있던 옷걸이 공간엔 내 작은 외투들만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작은 집에 둘이 살아도 불편한 점 하나 없다고 우겨 왔지만, 사실 마냥 편하지만도 않았다. 혼자 살 때와 세탁기 크기는 그대로인데 나오는 빨래 양이 두 배가 되어 밤낮없이 바쁘게 일하는 세탁기가 가여울 정도였다. 수납장은 진작에 물건들로 꽉 차 버렸고, 하루 종일 엉덩이를 들썩이며 부지런히 정리를 해도 뒤돌아서면 너저분해지는 작은 집은 어쩔 도리 없이 잡다한 생필품으로 집안 곳곳 테트리스를 해야 했다. 고양이 두 마리와 인간 두 명이 함께 사는 공간에 청소는 얼마나 필수적이었는지, 저녁에 청소를 싹하고 개운하게 잠들어도 아침이 오면 다시 버적버적 모래를 밟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점은, 나는 그와 함께 살아서 정말 행복했다. 그는 내게 진짜 '집'을 알려주었다. 집은 공간에 있지 않고 내가 돌아갈 곳에 있다는걸, 나는 그와 함께 살며 배웠다.
한번은 못 참고 이사 간 그에게 오늘은 우리 집으로 퇴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홀로 몇 번의 밤을 보내니, 혼자 밥을 먹고 잠에 드는 일들이 너무 적적했다. 집 앞에서 비싼 딸기를 사 왔는데 혼자 먹으니 맛있지 않았다. 재미있는 영상을 봐도 웃음은 콧김정도에서 멈추기 일쑤였다. 홀로 끼니를 때우니 식사시간이 한가롭지만서도 공허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빙- 집 안을 돌며 할 일을 해 나가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미뤄둔 책들을 펼쳐 들어도 시계 분침은 느릿느릿 움직이기만 하고. 혼자라는 것이 이토록 심심한 일이었나, 둘이 될 땐 번잡한 일들 투성이더니만.
사흘 밤을 쓸쓸히 지새울 뻔했는데 다정히도 집에 들러 준 그에게 이것저것 할 말이 많았다. 지하철 공익광고가 새롭게 바뀐 것부터 하루 바나나 두 개가 혈당 조절에 좋다는 알짜 지식까지. 며칠 만에 만난 그 옆에서 숨도 쉬지 않고 하고 싶었던 말들을 쏟아냈다. 만나자마자 내 손을 덥석 잡는 그를 내키지 않아 하는 척했지만, 하릴없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나 사실 너 엄청 많이 보고 싶었어. 이렇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는데 네가 없으니까 삼키게 되더라. 나 지금 엄청 기뻐'라고 속 좋게 내비쳐 보였다.
며칠 동안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겨우 사흘 만인데 시야에 담기는 그의 얼굴이 반갑고, 귓가에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달았다. 함께 살 때는 몰랐던 것들, 아니, 몰라봤던 감정이다.
미국의 한 티비쇼에서 어떤 남자가 청혼하고 싶은 여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만약에 우리가 결혼하게 된다면, 내가 살던 집 얼마만큼의 공간을 내어주고 당신을 맞이하고 싶지 않아. 내가 살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곳에 서랍 한 칸 비워주고 인심 쓰듯 '자, 네 짐은 여기에 두면 돼.'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야. 대신 새 집에서 이 공간은 너를 위해, 저 공간은 나를 위해,라고 고민하고 타협하며 시작했으면 좋겠어. 그게 내 바람이야.
이 말을 듣고 그와 함께 하는 동안 내가 너무 가혹하게 굴지 않았나 반성했다. 정말 나는 서랍만 비워주었을 뿐이었다. 나의 모든 생활 패턴에 당신이 맞춰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내 바람과 어긋나는 일들이 생기면 속상해하고 화내기 급급했다. 단지 몇 개의 서랍만큼의 인심으로 당신의 삶을 사려고 했다.
이제 오롯한 그의 집이 될 공간에 누워 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벽과 창문, 가구와 문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폈다. 이곳이 그의 집이 될 텐데... 싱크대도 작고 세탁기도 작은 공간에서 나보다 큰 몸을 뉠 그를 상상하며 우리가 함께 지나온 시간들을 세어 보았다. 한강을 하루에 두 번씩 넘어 다녔던 그의 지루한 출퇴근길을. 몇 분이라도 빨리 집에 돌아오고 싶었을 그의 발걸음을.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며 날 안아주는 그를. 이제 네가 해주는 맛있는 저녁밥을 먹을 수 없어 슬프다는 그의 마음을.
'이제는 네가 그의 집이 되어줘.'
그의 새로운 작은 집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방의 모서리에 앉아 홀로 작게 속삭였다.
'네가 나 대신 그의 피로를 씻어주고 단잠을 재워주고 적적한 날을 위로해 줘. 사람이 세상에 맘 붙일 공간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잖아. 혈혈단신 외로운 도시에서 외롭지 않게, 돌아갈 곳이 되어줘. 내 바람은 그거 하나야.'
이제 서랍장만큼의 인심이 아닌 오롯한 자신의 공간에서 그의 하루가 쌓여가길 바랄 뿐이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그가 마시다가 만, 반쯤 빈 콜라병이 꽂혀있고, 식탁 맞은편 의자에는 아직도 그의 채취가 묻은 잠옷이 걸려있다. 그의 베개는 항상 그 자리에 그의 머리 모양을 따라 움푹 패어 침대 머리맡을 차지하고 있다. 빨래통엔 아직도 그의 양말과 속옷들이 하나 둘 숨겨져 있으니. 내 공간에는 아직도 그가 남아있다. 그의 자리는 항상 여기에 있다. 내 마음 한가운데에, 아주 큰 공간을 차지하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