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목련의 아름다움은 가지에 있는 법이거든
사랑에게,
꽃나무들이 세상을 혼란하게 만들고 있는 날이네. 실상 우리 삶은 바뀐 게 없는데, 매 시간 터지는 꽃망울들로 하루하루 달라지는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는 우리의 바쁜 눈동자가 재미있어. 꽃잎 하나로 눈동자가 굴러가고 가던 걸음이 멈추는 게 참 웃기는 일이지 않아? 출근 지하철을 타려고 빠르게 역으로 걸어가는데 발이 안 떨어지더라고. 꽃들이 나를 붙잡았어. 가지 말라고. 여기로 오라고. 날이 이렇게 좋은데 무슨 회사냐고. 깊은 잠에 빠진 고양이들 곁에서 일어나는 아침보다 힘든, 다시 또 봄이야.
또 봄이라니. 꽃나무들이 세상을 혼란하게 만들고 있는 거 맞지? 어제와 똑같은 오늘 일뿐인데 팡팡 터지는 꽃잎이 우리의 판단을 어지럽게 하고, 일상을 유지하기 힘들게 하잖아. 내 마음은 삭막하기 그지없는데 꽃나무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 죽겠다니까.
요즘 내 마음 상자에 담긴 말들이 별로 없어서 편지를 쓸지 말지 많이 고민했어. 전에 써준 편지보다 훨씬 더 좋은 편지를 쓰고 싶은데 요새 내 매일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하잖아, 너도 알다시피. 매일매일 갈등하고 고민해도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기에 사주도 보고 운세도 보고, 나보다 인생을 더 많이 산 사람들에게도 물어봤는데, 그 어느 것에서도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없었어. 그게 당연한 거겠지. 누가 남의 인생에 배놔라 감놔라 할 수 있겠어.
내가 요즘 왜 서글프냐면 말이야. 나는 내가 이렇게 살 줄 몰랐거든. 서른이 넘은 내 모습을 상상하면 항상 멋진 모습만 떠올려졌으니까 지금의 내가 너무 초라해 보이는 것 같아. 그중에서 내가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나의 모습이 뭔 줄 알아? 내 삶을 개혁할 용기조차 못 내는 거. 늘 불평하고 우는소리만 하는 지금의 나 자신이 가장 싫어. 이렇게까지 내가 나를 불만족스럽게 여긴 적이 있었나. 나는 항상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아. 그래서 슬퍼.
어제는 회사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데 왈칵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 머리도 눈치채지 못한 새에 눈에 눈물이 차오르니까 당황스럽더라. 왜? 도대체 왜 울어? 애꿎은 천장을 보면서 마음을 삭히는데 뭔가 잘못된 거구나 깨달았어. 사람이 싫다가, 일이 싫어지고 이 시간을 견디는 게 힘들어지니 결국,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마지막은 날 싫어하게 되는구나. 남을 험담하고 비방하고 욕하며 푸는 스트레스가 다시 그대로 나에게 돌아오는 것 같이. 나쁜 기운에 오염되는 건 한순간인데. 그래서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했는데 결국 나는 오염되었나 봐. 꽤 좋은 삶을 살고 있지 않냐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그냥 내가 힘들어. 이 자리에 있는 내가 많이 싫어지는 것 같아.
하루에도 몇 번씩 수렁에 빠졌다가 다시 살아나고, 넘어졌다 또 회복하면서 이것이 인생이겠지 싶어. 이런 궂은 시간을 걷고 있는 내게 가장 큰 자랑거리는 너일 거야. 네가 없었다면 난 어땠을까. 네가 집을 떠난 지금에야말로 나는 너를 매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어. 지난주는 회사 일에, 사람 관계에 지쳐서 늦은 퇴근을 하는데 집에 가기가 싫더라. 배가 고파서 삼겹살도 먹고 싶고, 잔치국수도 먹고 싶고 곱창도 먹고 싶은데 아무도 없는 집에 도착하면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져서 그저 소파에 몸뚱어리를 뉘고 잠시 생각하지. 네가 보고 싶다고.
아, 그날 말이야. 우리 삼겹살 먹었던 날. 큰 행사 마치고 서울 끝 쪽에서 집에 돌아가던 네가 나에게 삼겹살을 먹이겠단 일념 하나로 우리 동네에 왔잖아. 정작 너는 호텔 뷔페로 점심 저녁을 이미 거하게 먹은 뒤였는데도. 너는 못 먹어도 내가 먹을 고기를 맛있게 구워주겠다며 정말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와줬잖아. 그날 정말 고마웠어. 나 정말 고기 먹고 싶은 날이었거든. 너도 많이 보고 싶었고. 진짜로 배가 불렀는지 고기는 한 점도 안 먹고, 내 앞에 앉아서 내 넋두리나 들어주고 말동무나 해주다가, 내 밥 위에 잘 구워진 고기만 쏙쏙 골라 얹어주다 돌아갔잖아.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 봤으니 됐다고. 이런 네가 있는데 무엇이 더 큰 자랑거리가 되겠어. 애인에게 필요한 건 애정뿐이라는 거. 그 외엔 다 부질없는 허깨비라는 걸 이제 난 알아.
꽃잎이 세상을 홀리고 별 볼일 없는 길거리를 마법처럼 꾸민데도, 진짜 아름다움은 그 나무에 숨겨져 있어. 우린 그걸 알아야 해.
추운 겨울날, 벚꽃 잎이 흐드러졌던 봄날을 추억하며 같은 길을 걸었는데, 봄 곁을 감싸던 환상과 마법은 온데간데없고 삐쩍 마르고 스산한 나뭇가지들 밖에 없더라고. 봄을 그렇게 찬란하게 났던 꽃나무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민둥 맨둥한 겨울의 꽃나무들을 바라보는데, 꽃을 품는 나무들은 조금 다르게 생겼더라? 벚나무는 몸통이 작고 표면이 매끄럽게 생겼어. 다른 나무들보다 색이 어둡고 채도가 낮아서 밤에는 잘 보이지도 않아. 나무 통이 하도 반질반질해서 이건 무슨 나무일까 궁금했었는데 알고 보니까 벚나무더라고. 아차 싶었어. 우리는 꽃이 내미는 아름다움에 눈을 빼앗겨 그 꽃을 품은 나무의 아름다움은 못 알아봤구나. 벚꽃이 그리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나무가 뒤에 살그머니 숨어있어서였구나. 세상의 지혜로운 틈새 하나를 더 알게 된 날이었어.
그러고 보니 목련 나무는 가지가 정말 아름답게 생겼어. 직선으로 날렵하지 않고 곡선으로 휘어져 그 끝에 까만 털옷을 둘러 싼 커다란 꽃 몽우리를 하나 달고 있지. 목련 나뭇가지의 그 자태가 유려하다고 감히 말할래. 목련이 가장 아름다워 보일 때는 꽃 몽우리의 털옷이 벗겨질랑 말랑 애간장을 태울 때인 것 같아. 까만 털옷을 패딩처럼 두른 그 꽃 몽우리는 곱게 말려서 하늘을 향해 솟아있거든. 그때 나는 봄을 경탄해. 또 한 번 내가 봄한테 당했구나 하고 내 패배를 시인하지.
또 쓰다 보니 어느새 긴 연서가 되었네. 아직 참외는 비싸더라. 딸기는 상했고, 냉이는 이제야 물을 만난 듯 활개를 치고 있네. 민들레는 아직 때가 아니야. 봄에 또 너에게 편지를 쓸 수 있어 기뻐. 네가 나를 응원하고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듯, 나도 너를 수없이 생각하고 바라보고 동경하고 있어. 봄여름 가을겨울이 다 지날 때에도 내 곁에 있어줘, 나를 향한 애정 하나만 있으면 돼.
사랑과 봄기운을 담아,
의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