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 변덕스럽다. 엄마는 이 씨 집안사람들은 다 변덕이 죽 끓듯 해 비위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고 자주 핀잔을 줬다. 엄마의 핀잔대로 진득하니 한 가지 일에 몰두하지 못해 포기가 무 뽑듯 쉽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천성을 가진 나도 자랑할 만한 시절이 있다. 삶을 이기고 견뎌낸 시절들이다. 그 시절 기억에는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어린 내가 있다.
중학교 생활이 지루해질 무렵 나는 필리핀으로 갔다. 그곳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가득할 것 같았다. 한창 외국에서의 삶을 동경할 때였다. 상상으로는 어디든 다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영어를 배우려면 미국이 낫겠지만, 일 년에 일 억이 든다던데... 학비가 저렴하다는 독일이나 프랑스로 갈까. 아니면 일본은? 한국이랑 가깝고 좋을 것 같은데.
상상 속에서 앞뒤는 재지 않았다. 어차피 내 삶은 모 아니면 도일 것 같았기 때문에.
패기와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던 청소년 시절의 나는 엄마에게 유학을 가겠다 말했다. 한국에서 그저 그런 사람으로 사느니 이방인으로 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마음이었다. 어린 나는 이방인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연하게 보장되었던 것들을 지키려 매번 종이 뭉치 한 다발을 이민국에 제출하고, 때마다 열 손가락에 파란 잉크를 묻히는 것이 이방인으로서 할 일이었다. 내 신분을 증명할 길은 여권이 전부였다. 그마저 잃어버리는 날엔 온갖 서류에 허덕여야 하는 게 바로 이방인이었다. 엄마의 품을 벗어나면 자유만 있을 줄 알았는데, 저 먼 나라에서 나는 그저 '어떤 외국인'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슬프게도 깨닫게 되었지만 말이다.
함께 필리핀에 건너간 친구 중 몇몇은 이곳에서 얼마간 지내다가 미국이나 뉴질랜드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이 나라는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는 투로 말했다. 여기서 영어를 배우면 발음이 구려져. 여긴 그냥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키우는 정도야. 몇 달 배우면 더 배울 것도 없다니까? 그래서 너는 어디로 갈 거야? 나는 생각했다.
'우리 엄마 아빠가 여기 보내준 것도 엄청 큰 건데.'
하지만 내 머리와 내 입술을 서로 다른 말을 내뱉었다. 나도 아마 미국이나 캐나다가 아닐까? 아직 정해진 게 없어서 더 알아보려고.
실체 없는 일들을 떠들며 기대하고 기대하던 어린 나는 결국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그곳에 쭉 남아있었다. 미국이나 캐나다는 물론, 호주나 뉴질랜드도 어림없었다. 내가 그곳에 가려면 우리 가족 중 누구 한쪽은 기울어져야 했다. 다들 떠난 자리에 남은 나는 그들이 말한 대로 "구린" 영어 발음을 썼고, 어느 정도 이상의 영어는 구사하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였기에 현지 친구들과 친해지려면 현지어를 배워야 했다. 그 당시 내게 필요한 건 유창한 영어가 아니라 생존의 언어였으니 배짱이 두둑해지는 법을 먼저 배웠다. 문제가 생기면 외국어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야 했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낯선 언어로 대처할 수 있어야 했다. 어쩌면 이방인으로써의 가장 값진 경험은 배짱을 키워낸 일이 아닐까 싶다.
필리핀으로 유학을 간 지 삼 년이 다 지나도록 나는 적응하지 못했다. 매일 밤 한국에 돌아가는 상상을 하며 울었다. 따뜻한 엄마 품, 엄마 밥, 집에 있는 모든 게 다 내 것이었던 시절이 그리웠다. 그 좋은 모든 걸 다 버리고 온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깟 영어가 뭐라고 스스로를 이런 후진국의 시골 촌구석에 처박아두었나. 내 손에 있었던 것들이 아쉬워서 혼났다. 투정 부리고 싶고, 위로받고 싶고 잘하고 있다 칭찬이 듣고 싶어 혼났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봄여름 가을겨울을 사는데 나는 항상 무더운 여름에만 머물러 있었다. 내 시간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었다.
처음 삼 년 동안은 방학을 맞아 잠시 한국에 나올 때, 필리핀으로 돌아가는 그날이 오지 않길 바랐다.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 엄마와 인천공항에 앉아있는 그 시간이 너무 싫었다. 코가 매워지고 눈이 뜨거워지는 걸 모른척하는 게 힘들었다. 무뚝뚝한 딸이라 엄마에게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흔들고 뒤돌아 출국장에 뚜벅뚜벅 걸어갔다. 내가 선택한 삶인데 못하겠다, 돌아가고 싶다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겐 주말 딱 한 번 엄마한테 전화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는데, 그때마다 엄마에게 배고프다 말했다. 먹고 싶은 것들을 쭉 나열하면, 엄마는 또 어떤 게 있냐 물어주고 한국 오면 다 사주겠다 했다. 배고프다는 말은 에두른 표현이었다. 힘들다, 외롭다, 돌아가고 싶다는 말 대신 배고프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엄마의 따뜻한 말을 듣고 싶었다.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가족은 언제든지 내게 손을 뻗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일 년을 버티고, 이 년을 견디니 삼 년째 되던 해부터는 삶이 자연스러워졌다. 내가 다녔던 하이 스쿨은 한국인이 아예 없는 학교였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혈기왕성한 학생들이 가득한 학교 앞을 지나기만 해도 그 에너지에 압도 당하기 마련이잖나. 하물며 현지 아이들만 다니는 학교에 나 혼자 덜렁 남겨졌다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만 같다. 머리 묶는 방법부터 걸쳐 맨 가방까지 몽땅 한국인스러운 내 모습에 아이들은 수근덕거리며 신기해했지만, 막상 다가오진 않았다. 간혹 내가 쓰는 펜이나 필통이 궁금해 물어오는 친구들은 있어도 조별 수업에 날 선택해 주는 친구들은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화장실에 자주 가 아이들의 동태를 살폈다. 그 생활이 하루 이틀 지속되니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내가 먼저 애들한테 물었다. 너네 간식 사 먹으러 가는 거야? 괜찮으면 나도 같이 가도 될까?
그렇게 나 자신을 깼다. 가만히 있으면 정말 가만히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줄만 알았던 '코리안 걸'이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모습을 보자 아이들도 점점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삶을 이겨냈다. 기세를 내 쪽으로 휘어잡았다. 그러니 마냥 손님 같기만 했던 내 삶이 자연스러워졌다.
다음편에 이어집니다.